서러운 시간이었다. 드림웍스가 '슈렉' '쿵푸팬더' 시리즈를 내놓으며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에서 인정받고, 픽사가 '토이 스토리' 시리즈와 '월 E' '업' 등 걸작 애니메이션을 쏟아낼 때 디즈니는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라이언 킹' 등이 이뤄놓은 옛 영광을 추억하며 손가락만 빨아야 했다.

▲ 겨울왕국, 영화
그랬던 디즈니가 '애니메이션 최초 1000만 관객 돌파'라는 전인미답의 경지로 돌아왔다. 완벽한 복귀전 승리다. 디즈니가 이룩한 '고전 애니메이션'을 스스로 뛰어 넘어 '뉴 클래식'을 창조하며 컴백한 것이다. 그 이름 '겨울왕국'(감독 크리스 벅·제니퍼 리)이다.

수입·배급사 소니 픽처스 릴리징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에 따르면 '겨울왕국'은 2일 오전 11시20분 개봉 46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넘어섰다. 국내 개봉 외화로는 '아바타'(감독 제임스 캐머론) 이후 두 번째이고,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다.

개봉 전 '겨울왕국'이 1000만 관객을 불러 모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2일(현지시간)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 등 각급 시상식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는 것, 주제가가 좋다는 것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다.

'겨울왕국'은 어떻게 1000만 관객을 넘어설 수 있었을까.

일등공신은 역시 이 뮤지컬 애니메이션의 주제곡인 '렛잇고(Let It Go)'를 위시한 뮤지컬 넘버다. '겨울왕국'은 '논스톱' '폼페이, 최후의 날' '찌라시, 위험한 소문' '수상한 그녀'에 밀리며 박스오피스 5위로 주저 앉았지만 '렛잇고'는 여전히 각 음원 차트 5위 안에 올라있다는 사실은 이 노래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겨울왕국'의 흥행이 절정에 달했던 설날 연휴에는 '렛잇고'뿐 아니라 '두 유 원트 투 빌드 어 스노맨(Do You Want To Build A Snowman)' '러브 이즈 언 오픈 도어(Love Is An Open Door)' 등 다수의 노래가 음원차트 상위권을 휩쓸었다.

'겨울왕국'의 뮤지컬 넘버는 극과 분리해 놓고 들어도 충분히 좋은 노래들이지만 폭발력은 결국 음악과 영상이 만났을 때 생겨난다.

'렛잇고'는 주인공 '엘사'가 묶었던 머리를 풀어버리고, 마치 피겨스케이팅을 하듯 얼음판을 미끄러지면서 자신만의 성을 만드는 장면과 최적으로 조합한다. '두 유 원트 투 빌드 어 스노맨'은 어린 '안나'가 성인이 되는 과정 그리고 언니 '엘사'를 그리워 하는 모습과 결합할 때 더 재밌는 노래다.

다수의 관객이 영화의 쾌감과 재미를 다시 한 번 느끼기 위해 '겨울왕국'의 노래를 찾게 되고, 입소문과 함께 '겨울왕국'을 자연스럽게 홍보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여기에 가수들의 '렛잇고' 커버와 패러디가 이어지면서 '겨울왕국'을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측면도 있다.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겨울왕국'의 OST는 디즈니 만의 화성을 충실히 따르고 있고, 기본적으로 괜찮은 음악"이라며 "각 캐릭터와 스토리에 음악이 정확하게 결합하면서 지금과 같은 파괴력을 갖게 됐다"고 분석했다. 단, "디즈니의 뮤지컬 넘버 중 역대 최고라는 찬사는 과한 것 같다"는 판단이다.

뛰어난 기술적 완성도는 '겨울왕국'의 1000만 관객을 가능케 한 또 다른 요소다. 디즈니의 기술력은 이 영화의 제목 그대로 '겨울' 풍경을 담아내는 데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엘사'가 눈과 얼음을 활용한 마법을 부리는 장면은 역동적이고, 눈에 묻힌 성과 마을을 비출 때는 서정적이다. 눈 결정 모양을 활용해 만든 '엘사'의 성과 성 안의 샹들리에부터 메달 장식까지, 눈을 시각적 모티브로 삼아 만들어진 이미지들이 관객을 현혹한다.

명징한 이미지 제시는 20여년 전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큰 성공을 거둘 때의 모습과 일치하는 측면도 있다. '인어공주'에서 묘사된 바다 속 풍경, '미녀와 야수'의 신나는 파티 장면, '라이언 킹'에서 볼 수 있었던 아프리카 초원의 모습은 관객을 영화에 더욱 빠져들게 했다. '겨울왕국'은 디즈니의 전통적인 흥행공식을 눈을 통해 재현해낸 것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겨울왕국'의 이미지는 환상적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며 "눈과 얼음으로 세계를 디자인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짚었다. 또 "설경이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서 오는 신비로움도 관객이 이 영화를 좋게 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고 봤다.

극중 '안나'는 이런 대사를 한다. "마법에는 눈이 어울려."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캐릭터와 이야기도 특기해야 한다. 특정 성격을 부여받은 인물이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하는 것이 극이라고 볼 때, 캐릭터와 이야기는 엄밀히 따지면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겨울왕국'이 기존의 평면적 이야기에서 탈피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엘사'는 여지껏 디즈니가 만든 주인공 중 가장 섹시한 캐릭터다. 단순히 짙은 눈화장과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옷을 입어서가 아니다. 봉인됐던 자신의 능력을 한껏 표출하며 "이제는 혼자 살겠다"고 외치는(이때 나오는 노래가 '렛잇고') 캐릭터는 어떤 애니메이션에도 없었다. 언제나 왕자나 주위 사람의 도움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전통적인 여주인공들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인물이다.

캐릭터가 독특하니 이야기는 기존의 틀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갈 의지가 있는 주인공이 왕자에게 의지해 살아간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죽음 일보직전의 '안나'를 살리는 것이 남자의 키스가 아니라 자매의 사랑이라는 설정은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이야기인 셈이다. '새로운 고전'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흔히 '디즈니 애니메이션'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을 가장 먼저 지운 것이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이다.

세종대 애니메이션학과 한창완 교수는 "디즈니에는 '뮬란'이나 '메리다' 같은 여전사 캐릭터도 있었다"면서도 "이런 캐릭터들은 상품화된 페미니즘의 도구로 쓰인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겨울왕국'의 '엘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 한 명 없이 혼자서 삶의 비극을 극복해낸다. 이러 면에서 '겨울왕국'의 캐릭터가 새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평했다.

건국대 영화과 송낙원 교수는 "'겨울왕국'은 디즈니 특유의 선택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픽사의 세계관이 투입된 작품"이라며 "이런 변화가 '겨울왕국' 성공의 밑바탕"이라고 풀이했다.

어린이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눈사람 '올라프' 또한 기억해야할 캐릭터다. 귀여운 몽상가인 '올라프'는 슬랩스틱 코미디로 아이들을 웃기고, "친구를 위해서는 녹아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순수함으로 성인 관객의 마음마저 움직인다. '올라프'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조연 중 가장 인상적인 인물로 남을 게 분명하다.

가족용 뮤지컬을 1만원 정도의 돈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도 '겨울왕국'의 흥행을 가능하게 한 요인 중 하나다.

최근 뮤지컬 시장은 주요 관객층인 20, 30대 여성을 타깃으로 한 공연이 대부분이어서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뮤지컬은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겨울왕국'은 이런 틈을 잘 파고 들었다.

'겨울왕국'은 일반적인 뮤지컬 티켓 한 장 값으로 수준 높은 뮤지컬 한 편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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