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이동제·ISA 등으로 은행원 교육·실적 압박 심화

 
[김선숙 기자]‘오전 5시, A은행 영업지점에 다니고 있는 심모(32) 대리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기존엔 8시 전까지만 출근을 하면 됐지만 최근엔 개인 공부와 팀 미팅, 사내 교육 등을 위해 7시 전에는 회사에 도착한다.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출시를 앞두고 사내 스터디 등이 부쩍 늘었다. 아침부터 바쁜 일정을 소화한 심 대리의 정식 업무는 오전 9시부터 시작된다. 입출금, 제신고, 상품판매, 대출, 외환 및 기업대출 등 다양한 업무가 심 대리를 기다리고 있다. 영업점 셔터문이 열리고 고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 시간은 순식간에 흐른다. 12시 점심시간이 됐지만 심 대리에겐 여유가 없다. 업부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점심을 3교대로 먹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은 약 40분 뿐이다. 이동·주문 시간 등을 고려하면 실제 식사 시간은 20분이 채 되지 않는다. 오후 4시 공식 업무가 종료되지만 일은 계속된다. 기본적인 마감 업무와 대출관련 전화를 돌리다보면 오후 8시는 돼야 한숨을 돌릴 수 있다. 이미 늦은 시간이지만 심대리는 퇴근 준비를 하지 않는다.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ISA 가입과 자사로의 계좌이동 등을 권하는 영업에 돌입한다. 심 대리는 이후에도 신상품 출시, 제도 시행 등 변경사항에 대한 교육과 미팅에 참여하고 개인적으로 나머지 공부까지 한다. 자정께 이미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 침대에 누우면 이미 오전 1시가 넘는다. 바로 잠들어도 수면 시간은 4시간 남짓. 주말이 와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이달 말에 있을 파생상품투자권유자문인력 자격증 시험을 보려면 휴일에도 공부를 해야한다. 자칫 시험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영업 경쟁력에 큰 타격을 입는다. 충전할 시간도 없이 강행군을 소화하고 있는 심 대리의 입에서는 요즘 "내가 뭘 위해 이렇게 살고 있지"라는 말이 떠나질 않는다‘

이렇듯 금융권 성과주의의 핵심으로 은행권이 지목된 가운데 계좌이동제와 ISA 출시 등으로 인한 실적 압박으로 은행원들이 삼중고를 겪고 있다.

1일 은행권에 따르면 최근 시중은행들은 직원들의 교육을 강화하며 영업실적 달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계좌이동제가 확대 시행된 데 이어 오는 14일에는 ISA가 출시되기 때문이다.

계좌이동서비스는 주거래 계좌를 다른 은행으로 변경할 때 기존 계좌에 등록된 여러 자동이체 항목들을 새로운 계좌로 간편하게 옮겨주는 서비스다.

전국은행연합회에 따르면 계좌이동서비스 3단계 시행 첫 날 '페이인포'(payinfo.or.kr)와 은행(창구·인터넷 구분 불가)을 통해 접수된 계좌 변경 신청은 무려 30만5071건에 달했다.

지난해 국내은행의 당기순이익은 3조5천억원으로 전년 6조원보다 2조5천억원이 줄었다. 은행권 전체의 수익성이 크게 떨어진 상황에서 계좌이동제 확대 시행은 타 은행의 주거래 고객을 빼앗아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고객 유치 경쟁에서 밀린다면 자사 주거래 고객을 내줄 수도 있는 위험도 함께 존재한다.

각 은행들은 기존 고객인 '집토끼'는 지키면서 경쟁사 고객인 '산토끼'를 끌어오기 위해 피 튀기는 경쟁을 하고 있다.

앞서 계좌이동제 관련 교육을 받은 각 은행 영업 직원들은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려 주거래계좌 이동을 부탁하거나 직접 업체들을 방문하며 유치전을 벌이고 있다.

한 은행 관계자는 "계좌이동제 3단계 시행 첫 날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고객들이 변경을 신청해 놀랐다"며 "공식적인 집계는 없지만 내부적으로 고객 유입·유출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기 때문에 관련 직원들은 항상 마음을 졸이고 있다"고 밝혔다.

ISA는 계좌 하나에 예·적금과 펀드, 파생결합증권 등 다양한 금융상품을 한꺼번에 넣어 운용하면서 세제 혜택까지 볼 수 있는 상품이다.

은행은 최근 금융위원회로부터 ISA에 한해 투자일임업을 허용받았는데 이렇게 되면 고객의 자산을 운용해주며 수수료를 받을 수 있다.

이는 예대마진에 치중했던 은행에 새로운 수익 창구가 될 전망이다. 은행들은 ISA 고객 유치에 사활을 걸었다.

문제는 고객들에게 포트폴리오를 설명해줘야 할 은행 직원들의 교육이 충분치 않다는 점이다.

투자일임업은 증권사 고유의 업무였기 때문에 ISA 출시를 불과 한 달 앞두고 투자일임업을 손에 쥔 은행권은 아직 준비가 덜 됐다.

ISA에는 주가연계증권(ELS)과 같이 원금손실 가능성이 있는 파생상품이 담기기 때문에 파생상품투자권유자문인력 자격증이 있어야 고객에게 관련 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

금융위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 전 은행 임직원 12만1000명 가운데 파생상품투자권유인력 자격증을 보유한 인원은 3만8601명으로 3분의1 수준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은행들은 부랴부랴 관련 교육을 실시하고 직원들에게 자율적인 학습을 독려하고 있다.

현재 파생상품투자권유인력이 되기 위해서는 금융투자협회 소속 금융투자교육원 주관의 20시간짜리 사전교육을 이수하고 자격시험에 통과해야 한다.

이 시험은 올해 4차례 실시된다. 첫 번째 시험은 지난 2월말 종료됐고 다음 시험은 이달 27일 진행된다.

ISA 출시가 오는 14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직 자격증이 없거나 지난 시험에 응시하지 못한 은행원들은 반드시 이번 3월 시험에서 합격증을 받아야만 한다.

최근 금융위는 '속성양성' 논란에도 현재 집합교육으로만 진행되고 있는 사전교육을 온라인 방식으로도 허용했는데 이 점을 감안하더라도 은행원들에게 20시간 사전교육과 촉박한 시험 일정은 상당한 부담이다.

다음 두 차례 시험은 각각 6월과 11월에 열리는데 만약 이번에 불합격한다면 한동안은 파생상품과 관련한 상품 판매나 상담은 할 수가 없다.

계좌이동제와 ISA 고객 유치에 정신이 없는 일선 직원들이 없는 시간까지 쪼개서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이유다. 자연스레 주말도 반납하게 된다.

한 은행원은 "기본적인 업무와 상품 영업만 하더라도 사실상 업무 시간을 초과하는 경우가 다수"라며 "결국 공부를 위해 개인 생활을 포기한지 오래"라고 설명했다.

그는 "너무 힘이 들어 하루 정도 푹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만약 이달 시험에서 합격하지 못하면 그만큼 내 영업 경쟁력은 떨어지고 이는 곧 개인 실적에 큰 손실로 이어진다"며 "고액 연봉, 은행원 타이틀을 떠나서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한 삶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금융당국에도 은행권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최근 계좌이동제 시연회에 참석해 "금융개혁이 실천되며 고객들은 편리하고 많은 혜택을 받게 됐지만 금융회사들은 그만큼 고객확보와 유지를 위해 더 치열한 경쟁을 벌일 수 밖에 없다"며 "계좌이동서비스를 계기로 은행권에 대한 국민 인식이 보다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만큼 기대에 부응하는 혁신적인 서비스가 지속될 수 있도록 은행권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은행권의 과도한 업무와 실적 압박이 자칫 불완전 판매와 같은 소비자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감을 나타내고 있다.

한 금융업계 관계자는 "분야를 막론하고 경쟁을 해야하는 것은 맞지만 최근 은행원들이 느끼는 업무 강도나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이라며 "ISA, 계좌이동제 도입 등으로 업계 내 그리고 타업권과의 경쟁이 심화되다 보니 어떻게든 고객을 유치해보려는 눈물 겨운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금융당국이 은행권을 성과주의 확산의 출발점으로 지목한 만큼 일선 직원들은 실적 관리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며 "지금과 같은 과다경쟁이 행여라도 불완전판매와 같은 부작용을 낳진 않을까 하는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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