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이 나라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전쟁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도 분단의 나라이고 보면 그 날의 기억은 비단 기억으로써가 아니라 현재까지도 진행형의 상처로 남아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내 개인적으로는 월남한 가족도 아니요, 또한 전쟁으로 부모형제를 잃은것도 아니니, 내 딴에는 혹독했다 할 경험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꽤나 행복한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아내를 만나고 난 이후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이 민족의 운명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 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지난달 20일 오전 제19차 남북 이산가족 1차 상봉단이 CIQ 남북출입사무소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동해선 육로를 따라 금강산으로 향하고 있다.
어쩔수 없는 운명

 아내의 가족은 함경도에서 대대로 살아온 집안이다. 내 아내 역시 그 곳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내의 고모가 김일성대학을 다니고 있었다고 하니 인텔리집 안이었던 셈이다. 상인이었던 장인어른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제일 먼저 피난에 나서야 할 형편이었다. 상인이야말로 어떤 계급보다 자본주의에 물들었다는 공산주의의 서슬 퍼런 칼날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실향민이 그렇듯 그 길이 고향과 40년 넘는 이별길이 되리라는 걸 상상하지도 못한 채, 원산에서 배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막 배에 올라서려는 순간, 그만 세살박이 내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황망 중에 떠나는 피난길에 오죽 경황이 없었으랴, 그만 아이의 손을 놓쳐 버린 것이다. 온 집안 식구들이 울며불며 어찌 할 바를 모르는데, 갑자기 그 고모가 기다리라 해놓고서는 집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가서 보니 세살박이 아내는 텅 빈 집 마루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봐도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그때 그 고모가 아니었다면 나를 만나는 것은 고사하고, 한 가족에게 얼마나 큰 아픔이 되었겠는가.

그 길로 부산을 거쳐 서울에 정착 해 남부럽지 않게 가게를 일구었지만, 언제나 장인어른에겐 실향민으로서의 허전함이 있었다. 특히 아내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가족들의 시샘을 살 정도였는데, 나는 그 애정의 한 귀퉁이에서 언제나 아픔 같은 것이 느껴지곤 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나와야 했던 장인은,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던 자식을 무사히 지켜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삼으셨을 것이고, 그 위안이 또 그런 각별한 애정을 낳았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제 장인 장모도 세상을 떠나고 그 아픔도 그만큼 희미해져서일까, 비록 아내만큼은 아니지만, 어린 나에게는 혹독하기만 했던 나의 전쟁의 경험도 이제는 그리운 모습으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춘강이 아버지의 완장

전쟁이 난 것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아버지는 오늘날 국세청이라 할 〈사세청〉에 근무하셨는데 공무원 집안인 만큼 제일 먼저 피난을 서둘러야 하는 건 당연했다.

'저 집이 공무원 집이다'한마디면 다 잡혀갈 판에 어떻게든지 집을 피해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 내 밑으로 동생 셋이 있었는데, 막 돌을 넘긴 셋째 동생을 포함해 다섯 살 여섯 살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나서는 피난길에 짐인들 제대로 챙겼을 리 없다.

설상가상으로 한강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남쪽을 가는 길마저 끊기고 오히려 북쪽인 아현동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숭문중학교 근방에서 그만 인민군들의 검문에 걸리고 말았다.

무엇하는 사람이냐는 다그침에 아버지는 장사꾼이라고 대답했다. 장사꾼치고는 복장이 너무 깨끗하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평소에 안 입던 오래된 옷을 골라 입고 나오셨던 것인데 '세비로'라고 하는 하얀색 양복을 입으셨던 걸로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구식'옷이 더 문제였다.

처음에는 보내줄 듯 하더니 갑자기 인민군을 아버지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이른바 검문검색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만 그 옷의 양복 윗주머니 속에서 공무원 뺏지가 발견되고 말았다.

안 입던 옷이어서 설마 그 속에 뱃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셨던 것이다.

“이 간나새끼! 이거 공무원 아니가? 와 장사꾼이라고 거짓말했어? 이 새끼 뭔가 수상하구먼. 따라 오라우!”

설명은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험상궂은 말을 늘어놓더니 인민군은 아버지를 끌고 갔다. 어머니와 나는 동생들의 손을 잡아 끌고 울면서 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공무원들은 다 잡아간다는 소문이 하도 극성을 부리던 때인지라 그 대담하던 어머니의 얼굴도 새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나는 예사롭지 않은 어머니의 그런 얼굴을 보고 더 겁을 집어먹는 건 당연했다.

우리는 지서 같은 곳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곳에 춘강이 아버지가 있는 것이다. 당시 우리는 마포에서 살았는데, 동네에서 주로 궂은 일을 하던 춘강이 아버지가 엉뚱하게 그 곳에서, 그것도 완장까지 차고 있을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니 경우 아버님 아니세요? 그런데 여기는 웬일...”

“동무! 이 간나들 아나? 이 새끼들 수상해서 끌고 왔음네!”

“아니 경우네가?...뭐가 수상했습니까?

“공무원 뺏지가 발견되었지 뭐가? 그래놓고 피난간다고 이 난리니, 피난은 가길 왜 가나? 뭔가 죄가 있으니 피난간다는 것 아니갔어?”

듣고만 있던 아버지가 용기를 내어 말씀하셨다.

“우리는 피난가는게 아니라 가회동에 있는 애들 고모님댁에 가는 길이었소!”

“입 닥치지 못하갔어? 그럼 와 장사꾼이라고 거짓말 시켰나? 이 동무래 사상이 이상하지 않고서야 와 그럼 떳떳이 말하지 못하고 대뜸 거짓말부터 하나?

안그래?”

정말 보통 큰 일이 아니었다. 어디 한군데 빠져나갈 틈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서슬이 퍼렇게 다그쳐대는데 웬만한 사람은 그 기세 앞에서 일단 기가 죽고 말 형편이었다. 그 때 춘강이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 경우 아버지는 절대로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 보장하지요. 한동네에서 오래 살아서 내가 잘 아는데 정말 좋은 분입니다. 없는 사람들에게 어찌나 친절하게 해 주는지 동네에서는 아주 법 없이도 살 분이라 소문이 난 분이지요. 갑자기 검문에 걸리고 보니 엉겁결에 장사꾼이라는 말이 나온 모양인데...내 보장할테니 걱정말고 풀어주시요.”

하는 모양새로 봐서 그 곳에서 춘강이 아버지의 위치가 만만찮아 보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춘강이 아버지의 장담에 인민군을 슬그머니 물러앉았다.

“그래? 그럼 동무가 알아서 하라우!”

결국 우리는 춘강이 아버지의 ‘증언’으로 풀려 날 수 있었다. 사실 한 동네에서 사는 사람일 뿐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요, 또 평생에 남에게 아쉬운 소리라고는 할 줄을 모르는 아버지였으니 뭐라 ‘부탁한다’ 는 말을 했을 리도 없건만, 춘강이 아버지는 그 살벌한 인민군 속에서 우리 가족을 구해 준 것이다.

나는 그것이 어머니 대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동네에서 인심 좋은 분으로 유명하셨던 분이다. 성격도 아주 호방하고 맏며느리답게 손도 커서 동네의 궂은일을 그냥 넘기는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 시절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숙명여고를 졸업한 현대 여성으로 아주 활동적이었고, 조용하고 엄격했던 아버지와는 오히려 정반대로 동네의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해내셨던 것이다.

특히 춘강이 아버지같이 가난한 축에 드는 동네 사람이라면 어머니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시체말로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이 겪는 사소한 불이익이 있으면 모두들 어머니에게 달려와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는 만사를 제쳐두고 그 일을 해결하러 다니곤 하셨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었다.

어떻든 어머니의 평소 인심의 결과이긴 하겠지만, 그 살벌한 인민군 속에서, 그것도 공무원 뺏지까지 발견된 마당에 우리 가족을 구해 준 춘강이 아버지의 은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비록 어릴 적 기억이지만 완장을 찬 모습으로 우리 가족을 배웅하던 춘강이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버님 역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춘강이 아버지 얘기를 가끔 하시곤 하셨으나, 그 이후 춘강이 아버지의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 완장을 차고 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는지, 아니면 그 완장을 버리고 남한 땅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그가 어떤 삶을 살았건 춘강이 아버지 또한 전쟁의 상처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으리라는 사실만을 되뇌일 뿐이다. <다음호에 계속...>

<프로필>

·1942년 4월 12일생
·경기중·고/고려대 경영 졸
·대한축구협회부회장
·대한수영연맹 명예회장
·제 11·13·14대 국회의원
·한국캠핑캐라바닝연맹 총재(현)
·세계캠핑캐라바닝연맹 아·태 지역위원회 의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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