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촌 문화축제인 가평 세계캠핑대회(FICC) 개막식이 지난2008년 26일 자라섬 중도에서 열린 가운데 행사에 참석한 장경우 조직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는 모습.
인천, 시다찌와 재가 되버린 인민군

아버님은 그 길로 기회동의 고모님댁으로 가 몸을 숨기고 계셨고, 우리는 한동안 마포 집에서 그냥 지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다시 우리를 시골 할머님댁에 데려다 놓고 아버님은 부산으로 내려가셨다. 전 ◯◯장관을 지낸 이태섭 씨의 부친이 아버지의 외삼촌인데 그 분과 함께였다.

나의 동생들과 어머니는 시흥의 할머니 댁에 남아 있었는데 남침 소문이 돌면서 다시 피난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인천의 이모님 댁이었다.

그런데 피난길에 당도한 인천에서 결과적으로 나는 2년이나 살게 되었다. 그 곳에서 신흥초등학교 3학년에 들어갔는데 그만 그 곳 친구들과 정이 들어 나중에는 전쟁이 끝나 아버님도 돌아오시고 가족이 서울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고집을 피워 1년을 더 이모님댁에서 유학을 했던 것이다.

그만큼 인천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너무나 재미있었고,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역시 아이는 아이였던 모양이다.

그 때 특히 기억에 나는 것은 송도에 있던 미군부대다. 그 때 미군부대를 '시다찌'라 불렀는데 인천의 모든 건달들이 다 모여드는 곳이었다. 트럭들이 시다찌 앞에 오면 멈칫하는데, 바로 그 순간 몇 사람이 차에 뛰어올라 물건을 던져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고학년 형들을 따라 열심히 물건을 주워 날랐다. 어리다고 안 데려가려는데도 기를 쓰고 따라다녔다.

물론 나중에는 어머니에게 틀키는 바람에 혼줄이 나 다시는 못 가봤지만 그 때는 그게 그렇게도 아쉽기만 했다.

그 와중에도 어린 내가 소화하기에는 너무 큰 충격적인 모습도 많았다. 당시 경인국도변은 9.28 수복 당시 교전이 많았던 곳이다. 복숭아 밭이 많았던 소사지역에는 가로변에 포플러나무가 죽 심어져 있었는데, 그 가로수 사이사이로 인민군들이 까맣게 탄 채로 주저앉아 있곤 했다.

손으로 툭! 하고 건드리면 총이 떨어지면서 인민군은 푹 주저앉아 버렸다.

어린 나이에 그 모습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까맣게 타버린 사람, 그리고 푹! 소리를 내면서 재가 되어 주저앉아버리는 모습. 그 이후 전쟁하면 가장 먼저 생가나는 장면도 바로 그 모습이다.

나는 지금껏 그보다 더 참혹하고 잔인한 전쟁의 장면을 떠올린 적이 없었다.

 'TV는 사랑을 싣고'

한때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두 친구와 한 분의 선생님을 생각한다. 나같은 사람에게 그런 출연의 기회가 올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언젠가 만약 그런 기회가 온다면 꼭 만나보고 싶은 두 친구가 있었다. 바로 이수익과 이승만이다.

그리고 3학년 때 담임을 하셨던 심재옥 선생님도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었다. 그러한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때 나는 피난 중에 들어간 신흥국민학교지만 그 곳 친구들고 무척 정이 들었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고집을 피워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일년을 더 이모님댁에서 유학을 했을 정도였으니 그 정이 이만저만 깊은 게 아니었다.

나는 신흥국민학교에서 3학년과 4학년을 다녔는데 그 때 동창중에는 인천대학 총장을 하고 있는 김학준 씨. 그리고 서울고검장을 지냈던 주광일 씨 등이 있다. 그리고 후일 그들이 하는 말로는 탤런트 태현실도 우리와 동창이어서 그 때부터 연극반 활동을 하곤 했다고 하는데 나는 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작 내가 친하게 지냈던 친구는 이수익과 이승만이라는 친구들이었는데 둘 다 고아원 아이들이었다. 둘은 아주 유명했는데 이수익은 공부로, 그리고 이승만은 싸움으로 유명했다.

고아원 친구들이었으니 실제 이름이 본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두 아이를 끔찍히도 좋아했다. 나보다 어른스러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마 나이도 많았을 것이다.

뭐 먹을만한 게 생겨도 꼭 그 친구들을 불러내 먹었고, 이모님에게 돈을 타거나 하면 뭘 자꾸만 사다 주곤 했다. 둘 다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아이들이었는데 유독 나하고만 허물없이 지냈던 걸 보면 그 아이들 역시 나를 꽤나 좋아했던 것 같다.

한번은 프란체스카 여사의 생신이라며 신흥국민학교의 밴드반이 서울까지 가서 기념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나 역시 밴드반으로 트럼본을 들고 서울까지 와서 행진을 하고는 나는 그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지금도 나에게는 그 사진이 있다.

그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기죽지 않으려고 자존심을 피우던 그 친구들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게 그려진다.

또한 내가 3학년 때 담임이었던 심재옥 선생님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이쁜 여성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지금까지도 그렇게 예쁜 여성을 만나본 적이 없는 것만 같다.

아무튼 그렇게 예뻤고 나를 그만큼 귀여워 해주시던 선생님이었다.

그 예쁜 모습으로 수업시간에 조용조용하게 말씀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면 전쟁의 총성은 아득하게 멀어지고 나는 마치 동화의 나라 속으로 날아온 피터팬처럼 모든 것이 꿈결 같았다. 정말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어난 한떨기 장미처럼 곱고 지순한 교육자였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속은 빤했는지 그 예쁜 선생님과 계속 곁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궁리에 궁리를 한 결과 느닷없이 막내삼촌을 떠올리고는 나중에는 막내삼촌과 선생님을 결혼시키게 해달라고 아버지를 조르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 선생님과 두 친구와의 만남 속에서 나는 인천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인 줄 알았다. 세상에서 신흥국민학교가 제일 좋은 학교이고 나중에 서울로 옮겨오고 난 후에도 나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중학교는 당연히 인천 중학교인 줄 알았다.

그래서 중학교에 진학을 할 때에도 느닷없이 인천중학교로 가겠다고 고집을 피워 선생님과 부모님의 애를 태우곤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심재옥 선생님은 물론 이수익과 이승만 두 친구도 내가 서울로 다시 돌아오면서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한동안은 소식도 주고받았던 것 같은데 전쟁 이후 그 혼란 속에서 그런 연락이 온전하게 지속될 수는 없었다.

그 이후로는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기에, 전쟁통에 만났던 나의 짧은 인연은 그렇게 추억으로만 남고 만 것이다.

누구보다도 전쟁의 아픔을 가장 깊고 크게 겪었던 두 친구, 그리고 그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아이들에게 꿈을 키워주셨던 심재옥 선생님,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그들도 얼마전 종영된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를 생각하지는 않았을지... 그들과의 만남은 그 길고 혹독했던 나의 전쟁의 기억을 가끔씩 그리운 것으로 뒤바꿔 놓곤 한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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