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배 기자] A양이 집을 빠져나온 것은 성탄절을 약 2주 앞둔 지난 12일 오전 10시 30분쯤. 아버지 B씨는 세탁실에 갇혀 있던 A양이 며칠 째 물만 먹다가 너무 배가 고파 밖으로 나오자 “왜 허락 없이 나왔느냐”며 빨간색 노끈으로 딸의 손발을 묶어 다시 감금했다.

탈출을 결심한 A양. 다행히 뒤로 묶인 손의 노끈이 풀렸고, A양은 2층 창문을 나와 가스 배관을 타고 밖으로 나왔다.

A양은 지난해에도 탈출을 시도해 집 밖으로 나온 적이 있다. 하지만 지나가던 음식배달원이 A양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는 집에 데려다 주는 바람에 다시 지옥같은 생활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영하권의 추운 날씨 속에 반바지·맨발로 동네를 돌아다니던 A양은 집에서 약 150m 떨어진 슈퍼마켓에 들어갔다. A양은 무엇에 홀린 듯 바구니에 과자·사탕 등을 마구 담다가 가게 한편에 주저앉아 과자를 허겁지겁 먹었다.

바구니 채로 슈퍼를 빠져나오려다가 주인에게 들키고 나서도 A양은 손에서 과자를 놓지 않을 정도로 음식에 집착했다. 그만큼 허기에 지쳤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추운 겨울 맨발로 탈출해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슈퍼마켓에 들어갔던 '인천 맨발 탈출 11세 소녀' 사건이 세상에 알려져 충격을 줬으나 도처에서 벌어지는 숱한 아동학대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어린이날이 만들어진 지 9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의 신음 소리는 세상의 음지에 가득하다.

◇부천 초등생부터 평택 원영이까지…주검으로 돌아온 아이들

인천 아동학대 사건 이후 정부가 실시한 장기결석 및 미취학 아동 전수조사를 통해 행방이 묘연했던 아이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지난 1월에는 부천의 한 초등학생이 4년만에 냉동된 주검으로 발견됐다. 아버지 최모씨는 "평소 목욕을 싫어하던 아들을 목욕시키기 위해 욕실로 끌고 가는 과정에서 아들이 앞으로 넘어져 의식을 잃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최씨와 한씨는 2012년 11월 경기 부천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아들 A군을 폭행, 사망케 한 뒤 대형마트에서 흉기 등을 구입해 시신을 훼손했다. 시신 일부는 냉장고 보관했다. 최씨는 시신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청국장을 사기도 했다.

최군이 숨을 거두기 전날에도 최씨는 만취한 상태로 2시간 동안 아들을 폭행하는 등 상습적으로 최군을 학대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2월에는 가출했다 돌아온 여중생 딸을 때려 숨지게 한 뒤 시신을 11개월 동안 집 안에 방치한 목사 아버지와 계모가 구속되기도 했다.

같은달 경남 고성에선 5년 전 당시 7살이던 딸을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의자에 묶어 폭행해 숨지게 한 어머니가 구속됐다. 시신은 경기 광주의 한 야산에 암매장된 상태였다.

지난 3월엔 경기 평택에서 미취학 아동이던 신원영(7)군이 친부와 계모의 학대로 숨져 야산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같은달 충북 청주에선 계부가 당시 4세였던 딸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욕조에 가둔 뒤 숨지게 한 사실이 드러났다.

 
◇미취학·장기결석 초·중생 35명은 '학대 아동'…10건 중 8건이 가정에서

정부가 지난 2월1일부터 4월15일까지 실시한 아동학대 전수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취학·장기결석 초·중생 2892명 중 총 35명이 학대를 경험했다.

이 중 13명은 경찰에 학대 아동으로 신고됐다. 22명은 아동보호전문기관에 학대 사실이 접수된 상태다.

아동학대 신고 건수도 늘고 있다. 경찰청이 발표한 '2015 경찰백서'에 따르면 지난 2014년 경북 칠곡 계모 아동학대 사망사건 이후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시행되면서 2014년 아동학대 신고 건수는 전년 1만3076건에서 1만7791건으로 약 36% 증가했다.

발생 건수 역시 증가했다. 접수된 신고 중 아동 학대가 실제 발생한 것으로 밝혀진 사례는 2013년 6796건에서 다음해 1만27건으로 48% 늘었다.

아동 학대 대부분은 가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서울시가 지난 13일 발표한 '2015년 서울시 아동학대 판정사례 가해자 유형별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시에서 발생한 아동 학대 사건 1167건 중 가해자가 부모인 경우는 976명으로 조사됐다. 전체의 83.6%에 달하는 수치다.

114건(9.8%)이 대리양육자, 31건(2.7%)이 친인척인 점을 고려하면 피해 아동과 가까운 어른들이 가해자인 비율은 전체 10건 중 9건을 넘는 셈이다.

◇정부 "학대의심 아동 찾겠다"…전문가들 "의무 부모교육 등 근본 대책 마련해야"

아동학대 문제가 불거지자 정부는 미취학이나 무단결석 아동 등 학대가 의심되는 아동들을 집중적으로 점검하는 대책을 내놨다.

교육부는 지난 2월 '미취학 및 무단결석 등 관리·대응 매뉴얼'을 발표해 올해 새학기부터 아동이 미취학·미입학·장기결석할 경우 결석 당일부터 유선연락을 실시하도록 했다.

미취학 및 무단결석 1~5일차에 학교장과 읍·면·동장이 동시에 유선연락을 하고 3~5일차 중 하루는 교직원과 사회복지 전담공무원 등으로 구성된 방문단이 가정방문을 해야 한다. 학생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거나 학대가 의심될 경우 3일차부터 경찰에 수사를 의뢰할 수 있다.

이후에도 학생이 학교에 나오지 않을 경우 보호자와 아동을 학교에 소환해 교원·학부모·아동보호기관 관계자 등으로 구성된 '의무교육학생관리위원회'에서 면담, 심의하게 된다.

9일 이상 연속 무단결석한 학생은 교육감 차원의 전담기구를 통해 관리하게 되며 월 1회 이상 소재·안전 확인을 의무화하고 확인불가시 경찰 수사를 즉시 의뢰하도록 했다.

경찰도 지난 20일 아동 학대 사건에 대응할 학대전담경찰관(APO)을 공식 출범시킨 상태다. 앞서 경찰은 지난 2월 기존 가정폭력전담경찰관 138명에 211명을 증원해 총 349명을 일선서에 배치했다.

학대전담경찰관들은 가정폭력 신고 출동시 아동 학대가 발생했는지 확인하고 입건되지 않은 가정폭력 신고도 아동 학대 차원의 심사를 병행해 아동 학대 여부를 상시 점검한다. 필요시 현장 방문이나 주변 탐문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정부의 대처가 '사후약방문'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노충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무단결석 후 며칠을 기다리는 건 적극적인 대응이 아니다"라며 "학교 안에 팀을 꾸려 신속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주영 동덕여대 아동학과 교수는 "아동학대는 저소득 등 취약계층에서 빈번히 일어난다"면서 "이들에 대한 전문인력을 추가로 배치해 관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근본적인 아동학대 방지는 가정 안에서 선행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했다.

노 교수는 "부모들이 학대를 학대로 인식하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체벌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훈육할 수 있도록 건강가정지원센터 등에서 부모교육을 의무로 받게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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