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일보 편집국장
적어도 내게 세시봉은 명동을 갈 때 꼭 들리는 아지트였다. 지하 계단을 내려가 좌측으로 들어서면 멀리 무대 위에서 지금은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생맥주 안주 값을 걱정하는 ‘재수생’에게는 대학만큼 절실한 장소였다.

간혹 TV에서 한번쯤 본 가수가 무대에 오를 때면 난 노래에 흠뻑 빠져들곤 했고 끝날 때 까지 있지 못하는 것에 ‘이 나라에 자유가 있나’란 뜬 금 없는 ‘운동권 재수생‘이 되고 했다.

내게는 우상이었던 송창식이 나온다고 예고한 날, 그날은 어김없이 공부와 연관된 사건으로 명동을 갈 수 없었고 세시봉은 먼 ‘희망의 섬‘이었다.

조금은 주머니가 넉넉한 날, 친구들과 호기롭게 생맥주에 과일 안주를 시키더라도 세시봉을 나설 때 명동의 화려한 불빛은 늘 날 이방인을 만들었다.

그래, 내게 세시봉은 그리움이자 한이고 멋이었고 대학 길목에 목로주점에서의 설움이었다.

그렇게 흐를 것 같지 않던 세월이 흐르고 언젠가부터 ‘세시봉’이란 이름이 회자되고 7080의 간판이 낮 설지 않은 지금, 가수 조영남의 불편한 사건을 접했다.

이 사건이 있고 몇 날이 지나 그는 “화투 오래 가지고 놀다가 쫄딱 망했다“는 말을 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사는 건 아니다‘ ’너무 늦게 철든 이의 자업자득‘이 아닌가 싶다.

왜냐면 세상사는 것, 그리 녹녹치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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