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명신, 전 주월사령관
[심일보 기자]장군묘역에 안장될 수 있었으나 "생사를 함께한 전우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2013년 사병묘역에 묻힌 채명신 장군,

4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의문투성이의 역사로 남아있는 베트남 전쟁, 베트남전 당시 초대 주월사령관을 지낸 故 채명신(1926∼2013) 예비역 중장이 생전 유언대로 파월 사병 묘역에 묻혔다.

육군은 2013년 11월 28일 오전 10시 서울현충원에서 고(故) 채명신 예비역 중장의 영결식을 '육군장'으로 거행했다.

영결식에는 유가족을 포함해 권오성 육군참모총장과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박세환 재향군인회 회장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고인에 대한 묵념, 조사 및 추념사, 헌화, 조가, 운구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권오성 육군참모총장은 조사에서 "'불멸의 군인', '영원한 지휘관' 채명신 장군님, 깊이 흠모합니다"라며 "장군님은 '누란의 위기'에서 조국을 지켜낸 '호국의 간성'이셨고 '혼돈의 시기'에 '올곧은 군인의 길'을 걸어오신 '참 군인'이셨다"고 추모했다.

이어 "장군님이 몸소 보여주신 위대한 '실천'과 '본(本)'은 후배 장병들의 가슴 속에 '영원한 가르침'으로 기억될 것"이라며 "장군님께서 물려주신 뜨거운 '나라 사랑의 마음'과 '군인정신'을 잊지 않고 기리겠습니다. 장군님의 큰 가르침을 바탕으로 '국가방위의 소명'을 이어가 '정예화된 선진강군'을 반드시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고인은 월남전에서 전사한 사병들이 묻힌 제2묘역 맨 앞 열의 3.3㎡(1평)에 안장됐다. 비석 역시 병사들과 같이 높이 76㎝, 폭 30㎝, 두께 13㎝의 화강암으로 세워졌다.

▲ 베트남 파병 초대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故 채명신 장군의 영결식이 2013년 11월 28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가운데 식을 마친 후 유해가 운구되고 있다.
그리고 3일후, 삼우제가 있었다.

부인 문정인 여사와 아들·딸을 비롯한 유족들, 베트남전 참전 노병들이 추모 예배를 하며 고인을 기렸다. 4일장으로 치러진 채 장군의 장례 기간 내내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았던 채 장군의 동생 채모 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흘간 밤샘을 하며 쌓인 피로를 걱정하여 '삼우제는 직계 가족만으로 치를 테니 나오지 말라.'는 문정인 여사의 배려 때문이었다. 동생 채씨는 채 장군이 60년 넘게 숨겨온 또 다른 미담의 주인공이다.

채씨는 채 장군이 1951년 초 강원도에서 생포한 조선노동당 제2비서 겸 북한군 대남유격부대 총사령관 (중장) 길원팔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녔던 전쟁 고아였다.

당시 육군 중령이던 채 장군은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이끌며 강원도 내에서 암약하던 북한군 색출작전을 펼쳤다. 채 장군에게 생포된 '길원팔'은 채 장군의 전향 권유를 거부하고 채 장군이 준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러면서 '전쟁 중 부모 잃은 소년을 아들처럼 키워왔다. 저기 밖에 있으니 그 소년을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적장이지만 길원팔의 인간됨에 끌린 채 장군은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그 소년을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켰다. 이름도 새로 지어주고 총각 처지에 그를 손수 돌봤다.

​소년은 채 장군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들어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 유명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두 사람은 채 장군이 숨질 때까지 우애 깊은 형제로 지내왔다고 한다. 채 장군의 자녀들은 그를 삼촌으로, 채 교수의 자녀들은 채 장군을 큰아버지라고 불렀다.

문정인 여사는 중앙 SUNDAY 기자와 만나 '채 장군이 길원팔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채 교수를 동생으로 맞은 것'이라며 '채 장군이 생전에 길원팔의 칭찬을 많이 했다. 적장이긴 하지만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문 여사는 '채 장군이 채 교수를 동생으로 입적한 건 채 장군의 나이(당시 25세)가 젊었고, 채 교수와의 나이 차도 11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채 교수가 형님이 별세하신데 대해 크게 슬퍼했고, 나흘 내내 빈소를 지켰다.'고 말했다. 채 장군은 총각 시절 본인이 손수 소년을 돌보다 그가 고교생이 됐을 무렵 문 여사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주변 사람에게 소년을 맡기고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서울대에 진학하도록 도왔다고 한다. 채 장군은 북한군 고위 간부가 데리고 있던 고아 소년을 입적시킨 사실이 문제가 돼 군 생활이나 진급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채 장군에게는 친동생 명세 씨가 있었다. 하지만 51년 채 장군이 연대장으로 복무하던 5사단의 다른 연대에 소대장으로 배속돼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이에 따라 채 교수는 형제자매가 없던 채 장군에게 유일한 동생이 되었다.

채명신 장군이 김일성의 오른팔로 불렸던 북한군 간부 길원팔이 맡긴 소년을 동생으로 삼은 건 채 장군과 길원팔의 짧고도 극적인 만남 때문이었다.

1951년 3월 25세 때 북한군 후방에 침투하는 한국군 최초의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지휘하던 채 장군(당시 중령)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의 군량밭이란 마을을 급습했다. '인민군 거물 길원팔이 숨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직후였다.

채 장군은 그곳을 지키던 북한군들에게 평안도 말씨로 '중앙당에서 나왔다. 조사할 게 있으니 협조해달라.'고 말해 안심시킨 뒤 그들을 전원 사살했다. 이어 세포위원장 집에 숨어있던 길원팔을 붙잡았다.

​그에게선 김일성 직인이 찍힌 작전 훈령과 전선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 등 특급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채 장군은 방에서 길원팔과 단둘이 마주보고 심문에 들어갔다. 채 장군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던 길원팔은 '네 놈은 누구냐?'고 되물었다.

​'대한민국 국군 유격대 사령관 채명신'이라고 답하자, '그 썩어빠진 이승만 괴뢰도당 중 이곳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 반란군 아니냐?'고 쏘아붙였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길원팔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불안한 기색이 없이 침착하고 당당했다. 그는 확실히 거물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채 장군은 '당신 같은 사람은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가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니 전향을 하라고 권유를 했다.

그러자 길원팔은 '썩어빠진 땅에 왜 가느냐?'며 일축했다. 이어 '부탁이 있다. 김일성 동지에게 선물받은 내 총으로 죽고 싶다.'고 말했다. 소년(채 교수)을 거둬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채 장군은 길원팔의 총에 실탄을 한 발 넣어 건네주고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잠시 후 총소리가 났고 길원팔은 책상에 머리를 숙인채 숨졌다.

​훗날 '혹시라도 길원팔이 뒷통수를 쏠 것이란 걱정은 안 들었나?'는 주변의 질문에 채 장군은 '늘 하느님이 방패가 되는 걸 믿었기에 두려움이 없었다.'고 답했다.

채 장군은 양지바른 곳에 길원팔을 묻고 ‘길원팔지묘(吉元八之墓)’란 묘비를 세운 뒤 부하들과 함께 경례했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적장이었지만 그는 충분히 경례를 받을 만한 장군이었다.'고 적었다.

고인은 1948년 육사 5기로 임관한 이후 5사단장, 주월 한국군사령관, 2군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중장으로 예편 후에는 1972~1977년 주 스웨덴·그리스·브라질 대사를 거쳤으며 대한해외참전전우회 명예회장,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회장,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6·25전쟁 당시 2사단 25연대 중대장, 유격대장, 7사단 5연대장, 3사단 참모장 및 22연대장으로서 수많은 전투에 참전해 전공을 세웠다.

또 1965년 8월부터 1969년 4월까지 초창기 주월 한국군사령관으로 근무했다. 당시 베트남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용전분투해 '월남전의 영웅, 채명신 장군'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전 세계에 한국군의 용맹을 과시하기도 했다.

특히 채 장군은 주월 한국군의 작전개념을 연대병력에서 중대병력으로 편성,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베트남 후방 건설 현장에 한국기업들이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군의 뛰어난 작전성과에 따른 것이었다.

채 장군은 “주월 한국군 사령부의 작전권을 미군 지휘 하에 두려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입장에 맞서 한국군이 작전권을 독립적으로 확보해야만 참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당시 주월 미국군 사령관이자 연합사 총사령관인 웨스트 모어랜드 장군과의 담판을 통해 한국군의 독립적인 작전권을 확보했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태극 무공훈장(1회), 화랑 무공훈장(1회), 충무 무공훈장(3회), 을지 무공훈장(2회), 국선장, 방위포장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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