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인회 前 회장
[이미영 기자]LG그룹 창업자 구인회(具仁會)는 1907년에 경남 진양군에서 농인 구제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1926년 서울 중앙보고에 진학했으나 1926년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서 선배·동료들과 함께 협동조합을 설립한다.

그는 어린 시절 일본인이 ‘눈깔사탕’ 팔아 번돈으로 사업을 확대하는 등 동네상권을 확대하는 것을 보고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1929년에 협동조합 이사장이 된 그는 부산·마산·진주 등지에서 석유·잡화 등을 구입해 마을사람들에게 팔면서 이득의 원리를 터득했다.

구인회는 부친으로부터 2000원을 받아 1931년에 진주에서 아우 철회와 함께 구인회상점이란 포목상을 열었다. 그는 동생과 함께 운수사업도 함께 병행했다. 구인회는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일어나자 전쟁특수를 예측하고 광목 2만 필을 사재기해 엄청 돈을 벌었다.

1940년 6월 구인회상점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고 어물 및 청과물도 취급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구인회는 구인회상회를 폐업하고 그해 11월에 부산 남포동 부근에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다. 당시 부산에는 목탄을 연료로 쓰는 일본식 주택이 많았다. 이들 주택에 데마도에서 목탄을 수입, 판매할 목적으로 이 회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회사 설립 후 구인회는 경남도청으로부터 화물차 30대를 사들여 운수업과 포목상도 겸했지만 사업은 신통치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동생 정회가 화장품메이커인 부산 흥아화학공업사의 김준환을 만났다. 이 회사의 생산직 직원이었던 김준환은 정회에게 화장품사업이 성업 중이란 얘기를 들었다.

◆락희화학공업사 설립

구인회 형제는 흥아공업에서 생산한 여성용 화장품인 아마쓰 구리무(크림)를 사다가 팔기시작했다. 그 무렵에 구인회의 처가 친척인 허준구가 경영에 참여했다.

그는 흥아공업에서 물건을 받아 서울에서 판매했다. 아마쓰 구리무에 대한 서울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자 구인회는 화장품을 직접 제조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화장품을 판매해서 얻은 자금과 고향의 논밭을 처분해 마련한 3000만 환으로 1947년 1월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했다. 공장은 서대신동에 있는 구인회의 집에 마련됐다.

사장은 구인회가, 부사장은 철회가 맡았으며 허준구는 판매를 담당했다. 김준환을 스카우트해 생산을 전담케 했다.

락희화학에서 생산한 제품에는 ‘럭키(lucky)'라는 상표를 붙여 출시했다. 그 당시 전국의 화장품업체는 20여 개 내외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많이 모자랐다. 화장품사업이 잘 돌아가자 구인회는 1949년에 장남 자경을 경영에 참여시켰다.

한국전쟁기간 동안에 일제 화장품이 대거 밀수되면서 국내 화장품업체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락희화학은 일제 향료를 수입해 제조한 뒤 판매하는 등 품질개선에 온힘을 쏟았다. 그 덕분에 ‘럭키’ 크림은 전국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또한 구인회는 플라스틱사업에도 진출했다. 쉽게 파손되지 않은 화장품 뚜껑을 개발하기 위해서다. 그때 국산 화장품의 뚜껑 소재는 유리로 되어 있어 쉽게 파손되곤 했다. 그래서 구인회는 플라스틱 뚜껑을 제조하기로 한 것이다. 개발은 주로 동생 태회가 담당했다.

구인회는 화장품판매로 벌어들인 3억 환으로 1952년 9월에 동양전기화학공업사를 설립하는 한편, 범일동 884번지에 건평 41평의 합성수지공장을 건립했다. 사출기 등을 설치하고 플라스틱제 머리빗과 비누곽·크림뚜껑 등도 만들었다. 이외로 소비자반응이 좋아 ‘럭키’ 플라스틱제품은 원가의 20~30배에 팔려나갔다.

구인회는 플라스틱 세면기와 식기생산 등 점차 품종을 넓히는 동시에 사업의 중심을 화장품에서 플라스틱성형으로 전환했다. 1953년에 화장품사업을 청산하고 동양전기를 락희화학에 흡수했다.

1953년 11월에는 국내외 판매 및 원료, 기계설비 등의 수입을 목적으로 락희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또한 락희화학은 1954년 5월에 미국 Abbe Engineering Co.로부터 치약배합기 등을 도입해 연지동에 전용공장을 확보하고 치약도 생산했다.

‘럭키치약’ 판매가 시작되자 수요가 급증했다. 이는 1955년부터 치약을 군납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55년도 자본금 기준 국내 10대기업 중 럭키화학이 4위에 마크될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후부터 락희화학은 플라스틱성형사업을 특화해 1956년에는 PCV파이프를 생산했고, 반도상사로 개명해 무역업도 강화했다. 1957년부터는 비닐장판·폴리에텔렌 필름을 생산하는 등 국내 최대의 화학제품업체가 됐다.

◆전자사업의 효시 금성사 차려

락희화학이 국내최대의 재벌로 도약할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부산에 전자회사인 글성사를 설립했기 때문이다. 1956년 락희화학 서울사무소 윤욱현 기획부장은 “평소 전축을 좋아해 전자기기에 대한 관심이 커 라디오를 생산해 보도록 구 사장에게 건의했다. 구 사장은 아직 국산라디오가 없는 점에 주목했다.

윤욱현을 중심으로 1958년 4월에 라디오·플라스틱 잡화·전기기기 부품·유라이트 등을 생산하는 공장건설 계획을 확정하고 기계 및 시설 도입비로 8만5195달러를 책정했다. 9월에는 서독의 라디오기술자인 Henke를 2년 계약으로 고용하고 12월에는 공고 및 공대졸업자들을 모집해 생산체제를 갖추었다. 1959년에는 차관 및 은행융자 등 때문에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생산에 착수한 결과 그해 11월에는 국내 최초의 국산라디오인 A-501을 생산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국산라디오에 대한 홍보부족과 외제라디오 때문에 금성사는 출발부터 존폐의 기로에 서야만 했다. .

1961년에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외제품 배격운동’을 정부차원에서 전개했다. 당시 정부는 이를 홍보할 매체로 라디오를 선정하고 ‘농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계기로 금성사는 1962년 한 해 동안만 13만7000대를 파는 등 4억3100만 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전화기 등도 생산하는 했고 1964년 말부터는 동남아·중남미 등에 전자제품을 수출, 급성장했다. ‘전자제품은 금성’이란 말이 소비자들 사이에 회자되어 금성사는 락희화학과 함께 쌍두마차로 자리매김했다. LG그룹이 재계의 전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경영 다각화

금성사 설립을 전후해 락희화학은 제조업중심의 경영 다각화를 전개했다. 1959년 3월에는 자본금 1억 환으로 락희유지공업을 설립했다. 치약원료인 글리세린을 생산하기 위해서다. 공장 건설자금은 1959년도 유지 부문의 ICA원조자금 34만 달러 등으로 충당했다.

글리세린은 비누의 부산물인 만큼 비누를 만들면 자연히 글리세린이 생산되었다. 당시 우지(는 소맥·원면 등과 함께 원조물자로 공급 됐기 때문에 비누공장들은 호황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글리세린은 애경유지가 독점 공급한 탓에 원료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락희화학은 값싼 우지를 이용해서 비누도 만들고 부산물로 치약원료인 글리세린도 생산하고자 락희유지를 설립했던 것이다.

1960년대 초에는 비닐제품에 대한 국내수요가 증가하자 1962년 8월에는 자본금 3000만 원의 락희비니루공업을 설립했다. . 1963년 7월에는 락희화학과 허진구(許晉九)가 50대50 비율로 한국미공을 설립해 서울 구로동에 공장을 건설했다. 1962년 5월에는 자본금 10억 환의 한국케이블공업도 설립했다. 5·16직후 정부가 부정축재기업인들에게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이득으로 5대 기간산업을 건설해 국가에 헌납할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구인회는 종합 전기 공장을 설립해 헌납하기로 하고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유럽·미국 등지를 방문했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구인회에게 송배전선공장을 설립하도록 권고, 서독의 Fuhrmeister사와 송배전선공장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구인회는 이 회사와 295만 달러의 차관계약 체결을 통해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호계리에 생산거점을 확보했다. 1966년에 이 공장은 금성사에 통합되었다가 1969년에 금성전선으로 분리되었다.

이로써 LG그룹은 모기업인 락희화학 산하에 금성사와 한국케이블·반도상사·락희유지·락희비니루·한국미공·국제신보 등을 두어 기업 집단을 형성했다. 이 무렵까지 LG그룹은 화학 중심의 수직계열화를 도모했다.

◆금성사의 美공장 진출

제5공화국이 출범한 1980년 12월 럭키그룹 회장실에서는 구씨·허씨 7인 운영회 사람들이 모여 해외 사업과 관련해 마지막 격론을 펼쳤다.

참석자는 회장 구자경과 구태회·평회·두회·자학, 허준구·신구 등 구씨·허씨 양 집안을 일컫는 이른바 ‘럭키 브라더스’와 이헌조 기획 조정실장이었다. 3년 전부터 금성사의 미국 공장 진출을 설계하고 준비해 왔지만 막상 최종 결정에 서는 의견 차가 심했다.

미국 진출과 관련해 격론이 오갔지만 결론은 지난 3년간 준비해온 대로 ‘추진 쪽’으로 결정이 났다. 그 결론 1990년대 글로벌 기업으로 탈바꿈하는 길이기도 했다.

허신구는 7인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새해가 밝자 방미 길에 올랐다.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지는 전자 쇼에 참가하는 국내 전자업체 대표단들이었다.

“일단 한번 가서 본 후, 북미 시장을 장악할 구상을 해 보자” 일단 둘러본 뒤 전략을 짜보자는 구상이었다. 금성사 미국 생산법인(GSAI) 진출은 현지 판매법인(GSEI)이 자리를 잡았다지만 전혀 녹록지 않았다. 미국은 컬러 TV가 연간 1200만대나 팔리는 황금 시장이었지만 한국 제품의 시장점유율은 겨우 4% 내외에 불과했다. .

‘현지에서 생산한 골드스타 제품을 들고 시장에 밀어 부쳤다. 허신구의 머릿속에는 30년 전 락희화학 시절 서울 을지로 4가 고물상 ‘만물상회’ 2층에 위치했던 락희가 떠올랐다. ‘그때 국산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소비자들을 보며 얼마나 절치부심했던가. 반드시 국산으로 시장을 석권하리라 다짐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자체 상표를 붙여 진출하는 명실상부한 골드스타의 진출 아니던가!’

허신구는 그간 금성사가 만든 제품이면서도 제니스, RCA 등 주문자표시부착상표 방식으로 수출해야만 했던 북미 시장에서의 종속적 고리를 끊어내야만 한다는 점을 절감했다.

자체 상표를 강화하기 위해 심지어는 골드스타 상표가 붙은 제품을 수입해 가는 바이어에게는 1~2%의 할인율을 적용해 주기도 했었다. ‘내 상품으로 남의 장사 치다꺼리를 하는 게 무슨 사업인가?’ 이제는 그런 절름발이식 사업에서 탈피하고도 싶었다.

그는 북미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대담한 계획을 품었다. 허신구 일행은 LA·샌프라시스코는 물론 일본 내쇼날사가 1950년대 말에 공장을 세운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 美 자치령)까지 샅샅이 훑었다. 최종적으로 현지조사팀은 앨라배마 주의 ‘헌츠빌’에 깃발을 꽂았다.

폴 제임즈 주지사가 고용 창출을 위해 해외기업 유치에 적극적이었으며 세금·노동력·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또한 헌츠빌은 미국 인구의 50퍼센트가 하루 수송권내에 밀집해 있고 중남미 직행로인 모빌 항이 인접해 있어, 제3국 수출에 용이했다. 금성사 공장을 유치하기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파격적인 조건으로 합작 투자

주 발전을 꾀하는 주지사 폴 제임즈의 대답과 함께 앨라배마 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공장부지 19만8000㎡(6만 평)을 주정부 재정으로 정지 작업 해주고, 건설자금은 시당국이 산업공채를 발행해 조달해 주는 조건이었다.

가격으로 따지면 3.3㎡당 1만 원 꼴인 셈이었다. 전체 80만 달러 보너스로 공장을 자유무역지대로 지정해 관세와 쿼터 혜택을 주고 전기·가스·용수 메인배관을 시비로 건설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이는 북미 시장에 진출하는 좋은 기회를 가져왔으며 글로벌 경영이 시작되는 청신화가 되었다.

◆5형제의 단결력

LG는 5.16군사 쿠데타 이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환수자금 명목으로 안양에 한국케이블(현 LG전선)을 건설해 헌납하게 됐다. 그 공로로 구평회는 고등군법회의에서 6년형을 구형받았다가 6개월만인 1962년 2월 선고유예로 풀려나 다시 경영에 복귀했다.

5.16 때 형님을 대신해 감옥에 가는 걸 마다않은 구평회의 우애는 구씨 집안의 단결력과 가문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오자마자 차관도입차 곧바로 서독으로 달려갔다. 구평회의 서독행 임무는 아세테이트 섬유 공장 건설을 위한 차관 및 시설재 도입이었다. 아세테이트 섬유는 옷감으로 사용하면 구겨지지 않고 물을 빨아들이지 않아 당시 대인기였다.

현재 LG와 GS는 다른 그룹으로 분리됐다. 압축성장시대에 화장품 플라스틱 제품 치약 등을 생산한 회사가 글로벌 회사로 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 물건이 그 시절엔 가장 필요한 경공업 제품이다. 어느 기업이나 중후 장대한 사업으로 시작하여 오늘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구씨·허씨간의 합작은 한국기업의 상생 모델로 자리 잡기에 충분하다. 창업자 구인회는 타계했지만 그가 지향한 기업경영 철학은 오늘날 LG와 GS 내부에 살아 숨쉬고 있다.

(자료 : 한국재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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