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소희 기자]"조국은 오래전 해방됐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해방되지 못했어. 아베 정부가 과거 잘못을 인정하고 제대로 사죄하지 않는 한 해방이라고 할 수 없지."

광복을 맞은 지 올해로 71주년이 됐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아직도 그 시절에 겪었던 참혹한 기억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가슴앓이를 하며 지낸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생채기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

광복절을 사흘 앞둔 지난 12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위치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쉼터인 '평화의 우리집'에서 만난 김복동(91) 할머니<사진>는 "처음엔 우리가 직접 피해 사실을 공개해 얘기하면 금방 사과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토로했다.

1926년 3월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15세이던 1941년에 일본 순사가 찾아와 군복 공장에 가지 않으면 가족들 모두 추방하고 재산도 뺏는다는 말에 겁이 나 하는 수 없이 일본에 가게 됐다. 하지만 실상은 공장이 아니라 데이신타이(정신대)로 끌려간 것. 그는 8년 동안 중국 광둥과 홍콩,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와 자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으로 끌려 다니며 설명하기도 어려운 모진 고초를 겪었다.

김 할머니는 해방 후 22세 나이로 겨우 고향에 돌아왔지만 지금껏 독신으로 살고 있다.

"고향에 돌아온 뒤 시집을 가라고 재촉하는 어머니에게 공장에서 일한 게 아니라고 사실대로 털어 놓을 수밖에 없었어. 끔찍한 얘기에 어머니도 처음에 믿지 못하셨지만 엉망이 된 내 몸을 보시고는 큰 충격을 받으셨지. 다른 사람이 알면 행여 딸이 손가락질 받을까봐 평생 속앓이를 하시다가 결국 화병으로 돌아가셨어."

이후 김 할머니는 부산에서 횟집을 운영하며 조용히 지내다가 1992년 우연히 TV에서 위안부 피해 신고를 받는다는 자막을 보고 오랜 고민 끝에 신고를 했다. 직접 나서지 않으면 위안부 문제가 이대로 묻힐 것 같다는 생각에 큰 용기를 낸 것이다.

"40년 넘게 혼자 품고 살아왔지만 죽기 전에 제대로 된 사과를 받고 한(恨)은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나서게 됐지. 근데 지금까지도 일본이 사과는커녕 발뺌만 할 줄은 몰랐어. 이리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그냥 가슴에 묻고 사는 게 나았을까 후회하기도 해…."

김 할머니는 올해 위안부 기림일과 광복절을 앞두고 유독 더 답답한 심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지난해 말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최근 한국 정부가 출범시킨 '화해·치유재단'에 일본 정부가 위로금 명목으로 10억엔을 출연키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내는 돈이 배상금도 아니고 '위로금'이라는데 그 돈 몇 푼 받으려고 우리가 수십 년 동안 싸운 게 아니라고. 아베가 정식으로 사과해서 위안부라는 꼬리표를 떼고 명예를 회복시켜준 다음 법적으로 배상해야 끝이 나는 일이야."

김 할머니는 특히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합의해놓고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태도에 분통이 터진다고 했다.

"우리 정부가 오히려 일을 망치고 있어. 우리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합의하고…. 우리가 오랜 기간 힘겹게 싸워온 걸 정부가 한꺼번에 무너뜨렸어. 이렇게 망칠 거면 차라리 정부가 예전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어."

김 할머니는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일본 정부에도 일침을 가했다.

"후손들에게 이런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국민들이 한 푼씩 모아서 소녀상을 세웠는데, 일본이 무슨 자격으로 철거하라 마라하는지 모르겠어."

자신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긴 나라인데도 김 할머니는 오히려 지난 4월 일본의 지진 소식에 복구 기금으로 100만원을 선뜻 기부했다. 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 모금 동참을 호소하기도 해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우리는 일본 정부와 싸우고 있지 일본 국민과 싸우는 게 아니야. 오히려 많은 일본 국민이 위안부 대책을 세우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는 걸. 일본 정부가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사죄하면 용서해 줄 수 있어.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있으니까."

할머니는 법적 배상금을 받는다면 전액 모두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공부하기 힘든 아이들을 돕는 데 쓰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 김 할머니는 지난해 분쟁지역 피해 아동 지원과 평화활동가 양성에 써달라며 평생 모은 전 재산 5000만원을 '나비기금'에 기부한 바 있다.

"어린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가 공부를 제대로 못한 것이 늘 한이었어. 일본 정부에서 배상금을 받으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장학금으로 주고 싶은데 언제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현재 40명뿐이다. 피해자로 등록된 238명 가운데 198명이 세상을 떠났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김 할머니는 눈 건강이 악화돼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태임에도 또다시 거리로 나가 마이크를 잡는다.

"일본 정부는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자진해서 몸 팔러 갔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하니 분통이 터져. 강제로 끌려가 그렇게 끔찍한 일을 겪었는데….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으니 먼저 간 이들 몫까지 내가 대신해 제대로 사과 받아서 명예를 회복하고 싶어."

김복동 할머니는 1993년 유엔인권위원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처음으로 파견돼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그외 미국, 일본,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증언 활동을 벌였다. 2012년 3월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같은 피해자인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나비기금'을 발족시켰다. 나비기금은 언젠가 일본이 공식 사죄를 하며 법적 배상금을 지불하면 그 전액을 전 세계의 '전쟁 중 성폭력 피해자' 등 각종 폭력으로 고통 받는 여성들에게 기부한다는 목표로 조성됐다.

김 할머니는 평소 집회나 행사장에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나비가 돼주세요. 외롭고 불쌍한 사람들 도와주시는 한 마리 나비가 돼주세요"라고 거듭 당부하곤 한다. 김 할머니는 '제67주년 세계 인권 선언의 날'을 맞아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2015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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