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경우 전 의원이 2009년 9월 30일 오전 여의도 자유선진당 당사에서 입당식을 갖고 이회창 총재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 달만에 바라 본 햇빛

그 즈음에 나는 병을 얻고 말았다. 까불며 놀다가 논물에 빠져 감기가 걸렸는데 그만 그것이 장티푸스로 전이되어 버린 것이다. 정말 대단한 열병이었다. 그렇다고 전쟁통에 무슨 약이 있을 리도 없었다. 할머니가 매일 이름도 알 수 없는 약초들을 달여 주시곤 했다.

 

그런데도 나의 병은 나을 기미가 없었다. 나중에는 머리가 빠질 정도였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나는 거의 할 달 정도를 그렇게 앓았다고 한다.

 

그렇게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을 때 하루는 가물가물 하는 중에 꽹과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거의 자포자기 상태가 된 할머니가 마지막 처방이라 생각하고 굿을 벌리신 것이다.

 

내가 누워 있던 사랑방의 앞마당에서 울긋불긋 차려입은 무당이 훌쩍 훌쩍 뛰어대며 꽹과리를 울려대도 나는 그 소리를 꿈속인듯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굿 때문은 아니었겟지만 아무튼 그 며칠 뒤 나는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할머니가 떠 넣어주는 죽을 먹고 처음으로 마루에 나와 햇빛을 보는 그 순간, 나는 세상이 온통 하얗게 탈색되어버린 듯한 그 빛에 주저앉고 말았다.

 

뒤뚱!하는 어지러움을 동반한 그 빛은 일찍이 내가 보지 못한 또 다른 세상 같았다. 

 

그 이후 지금까지도 난 그렇게 앓아 본 기억이 없다. 내 생애의 가장 위험한 고비를 전쟁통에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나는 시골에서의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새겨진 그림 한 장도.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그림 하나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당신이 계시던 사랑방에 가려면 꼭 소 외양간을 거쳐야만 했다. 사랑방에는 언제나 동네 어른들이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나는 빨리 사랑방에 들어가서 할아버지 무릎에 앉고 싶은데 그 뿔난 황소 옆을 지나기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러면 멀찌감치 선 채 일단 울기부터 시작한다. 그걸 신호로 할아버지는 문을 열고 '우리 손자 왔구나!'하시면서 냉큼 나를 안아가곤 하셨다.

 

그렇게 들어간 사랑방에서 문을 열고 바라보면 그 앞으로 노란 들녘이 펼쳐져 있었다. 봄이면 연두색이었을 것이고 여름이면 좀 더 짙푸른 녹색이었을텐데 어찌된 일인지 나에겐 노랗게 일렁이던 가을의 들판만이 뇌리에 박혀 있다.

 

그 들판은 지금 경인산업도로 그 앞으로 내다보이는 곳이다. 지금 보면 별반 넓지도 않건만 그 때는 그 평야가 왜 그리도 넓어 보였던지.

 

안동 사람들은 '이 세계에서 가장 넓은 들판은 풍산들'이라고 생각하며, 나중에 커서 김제 만경의 지평선이 가물거리는 장대한 평야를 보면서도 '안동에 가면 풍산들은 이보다 더 크다'고 엉뚱한 고집을 피운다고 한다.

 

그래서 '안동 답답이'라는 말도 생겨났다고 하는데, 나 또한 그에 견주어 말하면 '시흥 답답이'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껏 그렇게 넓고 큰 들판을 본 적이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 들판과 겹쳐져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것이 수원 인천간 협궤(狹軌)열차다. '하도 작아서 소와 충동했는데 소는 멀쩡하고 기차가 넘어졌다'는 농담 속의 바로 그 주인공이다.

 

유난히 느렸던 그 협궤열차는 왠 사람이 그리도 많이 탔던지 지붕까지 빽빽하게 올라타고서 엉금엉금 흡사 소가 걷듯이 예의 그 누런 들판 사이를 지나가곤 했다.

 

나는 동네 형들을 따라다니며 그 협궤열차를 퍽 자주 탔다. 물론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요, 대부분은 무임승차였다. 그런데 꽉꽉 들어찬 사람들을 밀치고 기차에 올라서는 순간에 '훅'하고 밀려오는 냄새가 있었다. 바로 바다냄새, 갯벌냄새였다.

 

보따리 보따리 싸인 것들은 젓갈이나 생선이 대부분이었고, 협궤열차는 아예 그 바닷냄새에 절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 협궤열차마저 사라지고 없으니 내 어릴 적 풍경은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지금도 시골에는 집안 어른들이며 사촌들이 그대로 살고 있지만 한 번식 갈 때마다 낯설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돌담길은 다 사라져 버리고 시멘트로 깔끔하게 포장된 길을 걷자면 눈앞에 밟히는 옛 모습이 그리워 하릴없이 먼 산만 바라보곤 한다.

 

물론 거침없이 흘러온 세월 속에서 무엇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 없고, 또 변화하는 것 자체가 꼭 나쁘달 것은 없지만 문득문득 아쉬워지는 건 내가 그 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일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당장에라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은 노란 들녘을 배경으로 한 그 풍경들은, 내가 간직한 가장 평화로운 모습이라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좋은 풍경화란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 아니라, 살고 싶어지는 마음을 일으켜 주는 곳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빌어 말하자면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그 풍경화는 분명 가장 좋은 풍경화임에 분명하다.

 

그 곳은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 나리라, 바로 내가 살고 싶은 곳, 아니 언젠가는 꼭 돌아가 살아야 될 것 같은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영원한 ‘집’으로 남아 있는 수암면의 할아버지댁, 그리고 지금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고 오직 내 마음 속에 간직된 그 풍경들은 가끔씩 내가 화가가 아닌 것을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주에 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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