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시 보광동 강변 언덕에 자리 잡은 아파트 11층의 아버님 댁 베란다에서 바라다보면 관악산이 아무런 시야 장애 없이 거침없이 눈앞으로 달려든다. 관악산(冠岳山)은 머리에 갓(冠)을 쓰고 어깨를 파도처럼 출렁이면서 흘러내리며 떡 벌어진 모습을 자랑하고, 그 오른쪽으로 동생 삼성산이 형님의 위용에 눌린 듯 하면서도 삼성산 주봉에서 깃대봉, 장군봉, 호암산의 봉우리들로 북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다.

그러다가 호암산은 서울을 향해 급히 달려들 듯한 자세로 급히 멈추었는지 산은 급한 비탈을 이루면서 멈춰 선다. 옛사람들은 이런 모습이 꼭 호랑이가 한양으로 달려들 듯한 모습으로 보았는지 산의 이름도 호암산(虎巖山)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런 호암산의 모습은 강남쪽에서 보는 것보다는 시흥대로로 서울과 안양을 오가면서 볼 때 더욱 그러한 호랑이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다.

 버스가 사당역에서 봉천동을 향하여 남부순환로를 오르는데 고개 위에 고개를 가로지른 다리가 보인다. 난 또 새로 길이 났는가 하며 쳐다보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지나다니는 차는 없고 다리 위에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어? 다리 위에도 나무를 심어?? 아! 전에 남부순환로로 잘린 관악산 생태축을 연결시킨다고 하더니 바로 그 생태통로였구나! 이제 사람들이 이런 것에까지 관심을 가져준다니 늦은 감은 있지만 그 얼마나 기쁜 일인가?

5412번 버스는 호압사 앞까지 간다고 하였지만 나는 신림동 고시촌을 걸어서 지나가고 싶어 도림천변에서 버스를 내렸다. 개울을 건너 골목길로 들어서니 여기 저기 보이는 간판들이 이곳이 고시촌임을 단박에 느끼게 한다. 고시 전문학원들의 간판이 여기저기 보이는가 하면 그 옆으론 고시 서점이 있고, 고시 독서실이 있다. 대부분의 주택들은 고시생들을 위한 원룸으로 되어 있고, 근처에는 고시 뷔페, 빨래방, PC방 등의 간판들이 여기 저기 눈에 띈다. 그야말로 고시생들을 위한 작은 도시가 형성된 것이다.

지나가다 보니 ‘고시원 원룸 협회 사무실’이란 간판도 보인다. 허! 참! 고시촌을 형성하다보니 이런 협회도 생겨나는구나.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이곳은 그저 평범한 주택가에 서울대생들을 위한 하숙집과 자취집들이 있던 곳인데 언제 이렇게 변해버린 것일까? 나는 방학이면 고시공부 한답시고 절을 찾아 산속으로, 고시원을 찾아 한적한 시골로 찾아들곤 하였는데, 지금은 그런 식으로 공부했다간 정보의 단절로 낙오된다고 방학 때면 오히려 지방학생들이 이곳 고시촌으로 몰려든다고 하니 세상은 그렇게 변해가는구나.

 호암길을 따라 올라가니 길은 미림여고, 신우초등학교를 지나면서 기울기를 더디하며 오른쪽으로 휘어져 산허리를 돌아나가는데 내가 찾던 천주교 삼성산 성지 팻말이 보여, 나는 비로소 포장길을 버리고 산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오래간만에 산길을 호젓하게 올라간다. 여럿이 같이 가는 산길은 외롭지 않아 좋으나, 이렇게 혼자 오르는 산길은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 산을 느끼면서 걸을 수 있어 또 좋다.

300m 정도 오르니 삼성산 성령수녀원, 피정의 집, 기도원, 청소년수련관이 모여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마당에 갓 쓰고 도포 입은 성인의 동상이 서 있고, 그 앞에서 한 남자가 열심히 빗질을 하고 있다. 수도원 안이라서 그렇게 보였나? 빗질하는 남자의 얼굴에는 추운 날씨에 힘든 모습은 전혀 없고 이런 일을 한다는 것에 행복한 모습이다. 기도원 안에선 찬송가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찬송가 소리가 귀에 익다. ‘나는 구원열차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어? 이건 개신교 부흥회 때 많이 부르는 찬송간데? 천주교에서도 은혜 받으려고 할 때는 같은 찬송을 부르나?

 
길을 좀 더 오르니 드디어 3 성인이 잠들어 있는 성지가 나타난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 주교(한국이름 : 범 세형), 모방 신부(나 백다록), 샤스땅 신부(정 아각백) 이렇게 3명의 성인은 성모마리아상이 내려다보는 앞에 나란히 묻혀 있었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여 사제가 없던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서양인 신부들. 이들이 이국적인 용모를 감추기 위해 상복으로 얼굴을 가리고 산길로만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느라고 그 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박해가 일어나자 신자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자수한 이들은 새남터의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지고, 그나마 목숨을 걸고 시신을 수습한 박바오르에 의하여 이곳에 영원한 안식처를 얻을 수 있었다.

삼성산(三聖山)이란 산 이름은 원래 원효, 의상, 윤필의 3명의 고승이 이곳에서 도를 닦은 것에서 유래하지 않은가? 천주교인들은 3명의 성인들이 이곳에 묻힌 것도 우연이 아니라며 삼성산이란 산 이름을 3명의 고승보다는 3명의 성인에 결부시켜 생각하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내려다보는 앞에는 이들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비문에는 시인 구상이 쓴 ‘님들의 피로서 증거한 복음과 함께 님들의 자취도 이 땅에 영원하오리’라는 구절이 새겨져있다. 그런데, 한 여인이 예수님 발을 붙잡고 어루만지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자신에게 전염되어 오는 것일까? 기도를 마친 그 여인은 근처의 나무십자가를 지고 성지를 돌기 시작한다.

무거울 텐데... 여인이 돌고 있는 곳에는 군데 군데 동판이 돌에 박혀 있었다. 예수님이 십자가 형을 받을 때부터 부활하실 때까지의 사건을 시간 순으로 동판에 새겨놓은 것이다. 여인은 이 동판을 따라 난 길을 돌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고독을 자신의 몸으로 체화(體化)시키려는 것이리라.

 
성지를 벗어나 계속 오르니 길은 옆으로 돌면서 머리 위로는 호암산 정상까지 바위들이 들쭉날쭉 가파르게 솟아있다. 그 동안 멀리서만 바라다보던 호랑이 턱밑에 나는 지금 와 있는 것이다. 눈을 들어 바위들을 바라보니 저 바위들을 이리 저리 붙잡고 젖히면서 오르고 싶은 욕망이 안 생기는 것은 아니나, 오르다가 호랑이가 한 번 포효라도 하면... 안 되겠지? 절벽면을 따라 잠시 거니는데 한 할머니가 바위 틈 사이에 촛불들을 켜놓고 그 앞에 여러 제물을 차려놓고 치성을 드리고 있다.

눈 여겨 보니 바위에는 북어 한 마리도 매달려 있다. 그렇지! 호랑이의 기운이 뻗쳐 나가고 있는 이곳이 기도발이 좋다고 소문이 안 날 리가 없겠지. 또 한쪽 바위면에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가 하면, 또 한쪽에는 만(卍)자가 그려져 있다. 그렇지! 이런 기도처를 무속신앙인들에게만 독점시키겠는가? 기독교 신자, 불교신자들도 기도드리러 와야겠지. 그러고보니 이곳은 천주교, 개신교, 불교, 무속신앙이 다 모여 있는 곳이구나.

 이렇게 기운이 센 호랑이가 한양으로 달려들려고 하는데, 특히 불의 기운을 갖고 있는 관악산의 호랑이가 달려들려고 하는데 이곳에 도읍을 튼 조선이 가만히 있겠는가? 더구나 이 호랑이 기세로 한양에 호환(虎患)이 많다고 하는 데...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궁궐을 지으면서 이 호랑이 기운을 어떻게 하든 눌러보려고 호랑이 심장에 해당되는 곳에 호압사(虎押寺)라는 절을 세웠다. 나는 이제 호압사를 향해 가려한다.

호압사를 향하여 야트막한 능선을 넘어가는데 웬 아줌마가 길도 없는 능선을 오르고 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쳐다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지 이 아줌마 멈춰서더니 바지를 쑥 내리며 앉는다. 되게 급했던 모양이구나. 그런데, 여름이면 나뭇잎에 확실히 은폐가 된다지만 이렇게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은 겨울에 제대로 가려지리라 생각했나?

나는 이 아줌마가 나를 보면 무안해 할까봐 부드러운 엉덩이 살색이 비치자마자 얼른 고개를 돌리고 바쁜 걸음으로 능선을 넘어갔다.

호압사로 들어서니 호압사는 호랑이를 누른다는 그 이름과는 달리 전각도 별로 없는 초라한 절이었다. 다만 마당에는 호압사 창건 때부터 오랜 풍상을 겪어옴직한 느티나무 2그루가 나를 맞이한다. 호압사는 호암산의 정기가 모인 심장부에 위치하여 기도도량으로 이름이 났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약사여래를 모시는 약사전만 남아 있다가 조금씩 중창되고 있었다. 어느 종교나 신도를 끌어들이는 데에는 기복신앙이 먼저인가? 이곳도 약사전 옆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 나반존자)를 함께 모신 삼성각(三聖閣)이 먼저 중창되었다.

그런데, 호압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정작 화장실(解憂所)다. 소변을 보려고 해우소를 찾는데 ‘解憂所’란 글자가 멋들어지게 흘림체로 쓰여져 있다. 많은 절을 보았지만 ‘解憂所’란 글자를 이렇게 멋들어지게 쓴 것은 처음 보는 것 같다.

호압사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무학대사는 호랑이가 한양을 바라보는 중간에 놓인 국사봉에 호랑이의 라이벌인 사자로 하여금 호랑이를 감시하기 위해 사자암(獅子庵)을 세웠단다. 그리고,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시흥3동 부근에 탑을 세우고, 호랑이 허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돌개(石狗)도 세웠단다.

그 놈의 호랑이 기가 얼마나 셌으면 조선은 이렇게 호랑이 몸을 돌아가며 눌러 놓았누?

이제 호암산 정상을 향해 올라야지? 절을 나와 올라가는데, 옆에 보이는 몇그루 나무의 가지에 달려있는 나뭇잎들이 반짝거린다. 응? 다른 나무들의 나뭇잎들은 다 떨어지고 그 나마 달려있는 것들도 생명력을 잃고 쪼그라들어 있는데, 이 나뭇잎들은 빛을 발한다? 궁금하여 다가가니 나뭇잎들을 코팅하여 나뭇잎마다 소원을 적어 매달아놓았다.

아하! 사람들이 이곳이 기도발이 잘 통하는 곳이란 얘기를 듣고 이렇게 자기 소원을 적어 매달아놓은 것이구나. 날씨만 따뜻하면 나도 이곳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단전호흡을 하면서 과연 그렇게 기운이 센 곳인지 느껴보고 싶기도 한데...

삼성산에서 호암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으로 다가가는데 오른쪽으로 능선 하나가 남서쪽으로 갈라져 내려가고 있는데, 이정표는 그쪽으로 가면 한우물이 있단다. 한우물? 저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무슨 우물이 있나? 일단 나는 능선 끝부분에서 안양시와 광명시를 조망(眺望)하기 위하여 그쪽으로 갔다와보기로 하였다. 능선은 온통 바위로 된 게 호암산이 바위산임을 더욱 실감하겠다.

 
능선을 전진하는데 능선상에 웬 석상이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다. 바로 돌개(石狗)였다! 아까 호암사에서 돌개 이야기를 읽을 때는 한 번 돌개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하였으나 이렇게 전혀 생각지 않다가 돌개를 보게 되니 그 기쁨이 배가되는 것 같다. 답사 이야기를 읽다보면 답사가들이 답사를 하다가 예상치 않은 답사물을 발견하고 흥분하는 것을 읽게 되는데,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기쁨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이 돌개는 이렇게 호랑이 등에 타고 앉아 호랑이에게 까불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리라. 돌개 한 마리로는 부족했는지 4마리를 여기 저기 세워 놓았었다는데 지금 남아있는 것은 이것 하나란다.

여기 돌개가 있으니 이 능선을 타고 밑에까지 내려가면 호랑이 꼬리를 땅에 고정시키려고 탑을 세운 곳도 있겠네?

돌개를 한 번 어루만지고 난 후 다시 능선을 타고 내려가는데 능선 오른쪽 바로 밑에 석축(石築)으로 돌려 막은 연못이 있다. 아니? 누가 이 능선 가까이에 연못을 만들었지? 바로 ‘한우물’이었다. 이 우물의 쓰임새에 대해선 아직까지도 잘 모르는지 설명문에는 기우제를 지내기 위한 것이라거나,

임진왜란 때 전라병마절도사 선거이 장군이 한양 탈환을 위해 이곳에 주둔을 하면서 군사들이 물을 마시기 위한 것이라거나, 궁궐의 화재를 방지하고 용의 조화로 불의 기운을 막기 위하여 이 우물을 사용하였다는 설을 적어놓고 있다. 전에 관악산이 불의 산이라 이를 누르기 위하여 연못을 파고 구리로 된 용을 넣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바로 이 우물인 것 같다.

조선 왕조는 이렇게 궁궐에 화재가 날까봐 절도 세우고, 돌개도 세우고 연못도 팠지. 그뿐인가? 남대문 옆에도 연못을 파고 ‘崇禮門’ 현판을 물이 쏟아지는 형상으로 세로쓰기하여 달고, 광화문 앞에는 해태상도 갖다놓고, 경복궁 안에는 ‘드므’까지 설치했건만 결국 궁궐은 많은 화마(火魔)를 당하였고,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대원군이 재건할 때까지 잡초만 자라는 황량한 터로 남아있지 않았는가?

한우물은 웬만한 가뭄에도 물이 별로 줄지 않는다고 하는데 올해 가뭄은 유달리 심해서인지 옆에 여의도에서 왔다는 아줌마가 물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우물 옆에는 우물이 오염되니 이곳에 물고기나 자라 등을 방생하지 말라고 경고판이 있다. 한우물 옆에 불영암이란 암자가 있는데 이곳 신자들의 소행인 모양이다.

한강에서도 생태계를 교란시킨다고 방생하지 말라는 얘기가 있던데 방생의 진정한 뜻만 취하고 이런 부작용 심한 형식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불영암에는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대웅전 하나만 달랑 있고 아무런 안내판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별로 유서 깊은 절은 아닌가보다.

비록 여의도 아줌마는 이 절이 신라 도선국사 때 창건한 절이라고 강변하지만... 불영암(佛影庵)이라면 부처의 그림자가 비친 암자라는 뜻일 것 같은데, 여기 한우물에 부처의 그림자가 비치었나?

한우물의 설명문을 보니 이곳 호암산에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축성한 호암산성도 약 300m 정도의 성축(城築)이 남아있다고 한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와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하여 한강을 넘어 수원 지역으로 내려가는 육로와 남양만으로 침입하는 해로를 효과적으로 방어, 공격하기에 좋은 이곳에 산성을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이정표도 없어서 남아있는 성축이 어디쯤에 있는 지 알 수가 없다.

 
능선 내리막 전까지 가보았지만 나무들 때문에 시야가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한우물 옆에 설치한 전망대가 역시 그 이름값을 한다. 전망대에 서니 바로 밑의 금천구 시가지가 보이고 안양천 너머로 광명시가지도 보이며 그 왼편으론 기아자동차의 넓은 소하리 공장도 보인다.

그리고, 그 바로 뒤에서 구름산과 서산이 이곳 호암산과 함께 금천구와 광명시를 품에 싸고 있고, 그 너머로 소래산과 그 오른쪽 저 멀리로 계양산이 나를 보아달라고 하고 있으며, 소래산 뒤에선 인천의 문학경기장이 살짝 둥근 경기장 지붕을 흔들고 있다.

자! 이제 드디어 호랑이 머리 위로 올라타러 가야지? 발길을 돌려 걸으며 돌개에게도 호랑이 잘 지키라고 인사하고 빠른 걸음으로 능선을 되짚어 올라간다. 그런데, 아까 보이지 않던 막걸리 아줌마가 보이더니 길은 자꾸 오른쪽으로 틀어진다.

아하! 내가 삼성산 정상쪽으로 가는 길로 잘못 들어섰구나. 이리 가도 주능선으로 올라서면 다시 왼쪽으로 꺾여 가면 되겠지만 조금 더 가보아도 금방 주능선으로 합쳐질 것 같지도 않고, 아까 지나친 막걸리 아줌마가 자꾸 생각나 다시 돌아섰다. 역시 막걸리 한잔 쭈~욱 들이키니 추운 날씨지만 속은 상쾌해진다.

드디어 주능선으로 올라서 한발 한발 호암산 정상을 향해 다가가는데 먼저 나타나는 것은 헬기장. 나무 없는 넓은 공터라 햇빛이 잘 비추니 추운 날씨에도 땅은 약간 질척질척한데, 순간 작년 12. 24.에도 이곳에 온 기억이 난다. 그 때도 이곳 부분은 약간 질척였지. 더 전진하니 앞이 뚝 끊기고 바위들이 얼기설기 바로 밑으로 내려서고 있다.

드디어 315m 높이의 호랑이 머리 위에 선 것이다. 호암산은 일명 민주동산이라고도 하는 데,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어느 투사가 민주동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인가? 작년에는 삼성산 정상을 목표로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아까 헬기장 있는 곳까지 왔다가 돌아섰는데 그곳에서 조금만 전진하면 이런 탁 트인 전망이 나오는 것을 몰랐구나.

호랑이 머리 위에 서니 바로 밑으로는 아까 지나온 천주교 삼성산 성지가 숲속에 자리 잡고 있고, 눈을 점차 멀리 하니 아까 올라온 신림동 고시촌을 지나 장군봉과 국사봉이 인간 주택들에 포위되어 점점 더 목을 조이며 올라오고 있는 건물들에 헉헉대고 있는 것 같다. 저 국사봉 왼쪽 사면(斜面)에 있는 사자암에서 사자가 이곳 호랑이를 감시하고 있단 말이지? 한강 너머로는 안산과 남산 너머로 북한산과 도봉산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그 오른쪽으로 수락산과 불암산이 뻗어 내려가고 있다.

이곳에 서니 호암산 호랑이로서는 과연 두 세 걸음에 한양 도성으로 뛰어갈 수 있을 것 같다. 호암산 호랑이야! 지금 나를 태우고 이곳을 박차고 뛰어 나가보려무나.

저녁 때 고등학교 동기 부부망년회가 있으니 이제 슬슬 내려가야겠다. 아까 헬기장을 지나 숲속길로 들어서니 그저께 내린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다. 올겨울 들어 처음으로 눈길을 걸어본다. 기분 좋은 발밑의 감촉. 미처 아이젠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미끄덩 한다.

나 또한 준비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양손에 쥔 지팡이가 미끄럼을 막아주고 몸의 균형을 잡아준다. 장군봉을 지나 주능선을 따라 가다가 왼쪽 계곡길로 내려섰다. 조금 내려가다보니 또 조그만 연못이 보인다. 어? 여기도 연못이? 그러나, 여기는 아까의 한우물과는 달리 요 근래에 폐쇄된 약수터를 생태연못으로 조성한 곳. 관악구의 머리가 생태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구나.

조금 더 내려가니 너럭바위가 나타나고 바위 여기 저기에 사람들이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나도 배낭에서 과자를 꺼내어 맞은편 관악산을 쳐다보면서 한 조각씩 깨어 문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데 등산로 주위의 나무에 여기 저기 이름표를 달아놓아 천천히 속으로 나무의 이름을 불러주며 내려가는 데, 같은 이름의 나무들이 계속 나오니 둔한 내 머리로도 몇몇 나무들은 익힐 수 있었다.

잎이 떡을 쌀 수 있을 정도로 넓다 하여 떡갈나무, 참나무중 봄에 제일 먼저 잎이 나온다고 신갈나무, 잎과 열매가 제일 작다고 하여 졸참나무, 껍질이 코르크질로 두툼하다고 하여 굴참나무, 그 외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등 활엽수중에는 참나무 종류가 제일 많았다. 평소 껍질이 미끈하게 빠져 이름이 궁금하였던 나무도 때죽나무란 걸 알았는데, 이 나무는 나무 전체에 매달리는 흰꽃과 열매가 종과 같다고 하여 서양에선 눈종(snow bell)이라고도 한다네.

또, 이 나무와는 반대로 껍질이 딱지를 붙여놓은 듯 닥지닥지하여, 전에 등산하면서 심심풀이로 딱지를 잡아당기며 무슨 나무가 껍질이 이렇지? 하던 나무는 물박달나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건 혼자 등산하면서 얻는 수확이다. 친구나 동료들과 산행하다보면 그냥 지나치는 일행들을 따라 내려가느라고 이름표를 보더라도 건성으로 보며 지나가니 말이다.

 
내려가다보니 이건 또 뭐야? 1997. 10. 울산에서 검거된 부부간첩 최정남, 강연정이 장비를 은닉했던 장소란다. 최근에 일심회라는 간첩 조직이 떠들썩한데 때마침 여기서 간첩 얘기를 보게 되는구나. 설명문에는 수사과정에서 40여년간 고정간첩으로 활약해오던 서울지하철공사에 근무하던 심정웅도 검거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걸 보니 누군가 남한에는 아직도 암약하는 수많은 고정간첩이 있다고 진지하게 얘기하던 것이 생각나는구나.

그런데, 어떻게 간첩들이 이렇게 등산객들이 많이 다니는 등산로 부근에 장비를 은닉할 생각을 하였지?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것인가?

이제 계곡을 거의 다 내려와 도림천을 따라 걷는 데, 개울 건너편 서울대 건물들이 개천 가까이까지 서 있다. 이젠 빈 공간이란 빈 공간은 다 건물로 채우는구나. 내가 학교 다닐 때보다 배 이상은 건물이 늘어났을 것 같다. 조금 더 가니 개천 옆에 조그만 못이 나타나는데 관악산 호수공원이란다.

여기에 이런 호수공원이 있었나? 안내판을 보니 예전에 있던 수영장이 이렇게 호수공원으로 환골탈퇴한 것이다. 맞다! 학교 다닐 때 여기에 수영장이 있었지!

호수라고 하기에는 조그만 못 주위에는 자하정(紫霞亭)이란 정자도 만들어놨는데 이곳에 사시던 조선조 19세기의 한시문학의 대가인 자하 신위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정자란다. 주위에는 자하 선생을 기리는 비(碑)도 있었다. 과천의 시흥향교쪽에서 연주암 가는 계곡을 자하동천(紫霞洞天)이라고 하는데, 신위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이곳의 지명을 자기의 호로 한 것이구나.

 
공원에는 또 관악구에 거주하였다는 미당 서정주의 ‘관악구에 새해가 오면’이라는 시비(詩碑)가 있었고, 또 아까 산 위에서 보았던 석구상(石狗像)의 모조품도 여기에 세워놓았다.

이제 관악산 등산로 입구에 세워놓은 일주문을 빠져 나간다. 등산로 입구에 이렇게 일주문을 세워놓은 것 또한 관악산만의 특색. 대학 다니면서 늘 옆으로 지나다니던 산이었고, 지금도 반포에 살면서 수시로 쳐다보는 산이건만, 이렇게 호랑이에 얽힌 숨은 이야기를 알게 된 오늘은 정말 뿌듯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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