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일보 편집국장
1941년 케네디는 하버드법과대학원 재학 중 육군 장교 후보생 시험, 해군장교 후보생 시험에서 잇따라 낙방을 하였다.

그는 억만장자 아버지에게 애절한 편지를 썼고 아버지는 정계와 군(軍)의 인맥을 움직여 아들을 해군에 집어넣었다.

모두가 2차 대전에 참전하는데 이 국민 대열(隊列)에서 낙오하게 되면 장래 나라의 지도자는 커녕 어떤 공직에도 갈 수 없는 것이 당시 미국의 도덕률이었다.

이렇게 해군에 들어가 훗날 남태평양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은 그는 평생 진통제와 각성제의 힘으로 살아나갔다.

트루먼은 안경이 없으면 장님과 마찬가지인 지독한 근시였다.

그런 그가 1차 세계대전에 포병 대위로 프랑스에서 싸웠다. 시력검사표를 달달 외워서 신체검사를 통과한 덕분이다.

케네디와 트루먼의 이야기는 어수룩하게 보이는 미국이 사실은 무서운 나라라는 것을 보여준다.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던 1916년 6월 영국군은 프랑스 북부 솜강(江) 지역 전투에 25개 사단을 투입했다.

돌격 명령과 함께 영국 젊은 병사들은 40㎏ 가까운 군장(軍裝)을 짊어지고 독일군 기관총 총구(銃口)를 향해 온몸을 드러낸 채 진흙탕을 달려 나갔다.

소대와 분대의 앞장을 선 것은 귀족 또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젊은 소위들이었다. 전투 첫날 7만 여명의 영국군이 전사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50년대 차례로 영국 총리를 지낸 애트리· 이든· 맥밀런이 이런 지옥과 같은 전투의 생존자들이었다.

세 사람은 전쟁이 끝나고 대학에 복학(復學)했으나 함께 전쟁에 나갔던 학우(學友)의 3분의 1은 끝내 학교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50세 이하 영국 귀족의 20%가 1차 대전에서 전사했다. 귀족과 명문대학 출신의 전사자 비율은 노동자 농민보다 높았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아들제임스 루스벨트는 2차 대전 때 해병대 제 2기습대대에서 복무 중 마킨 제도의 일본군 기지를 기습하는 매우 위험한 작전을 앞두고 이 작전에서 제외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유인즉 만약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거나 전사하거나 하면 일본군은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전쟁에 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완강히 거절했다. 니미츠 해군제독까지 나서 설득했지만 실패하자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이를 만류토록 건의 하였다.

대통령은 해군 참모총장 킹 제독에게 ''내 아들은 제2 기습대대의 장교다.

내 아들이 위험한 특공작전에 가지 않는다면 누가 그 작전에 가겠는가?'' 라고 마킨 제독에게 그를 특공작전에 참가 시킬 것을 지시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네 아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2차 대전에 참전 하였다.

미국의 입장에서 어찌 보면 자신들과는 크게 상관없었을 한국전쟁에서 모두 139명의 미군장성들의 자제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그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한국전쟁중 미군의 사망자는 3만3,686명 포로 및 실종 8,176명, 부상자는 9만2,134명 이었다.

그들 중에는 52년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 육군 원수의 아들인 하이젠하워 소령과 제 3대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 대장의 아들도 포함되어 있다.

미 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대장의 외아들 밴플리트 2세는 야간폭격기 조종사로 작전 수행 중 북한군의 대공포화에 의해 산화되었다.

워커장군은 아들과 함께 한국전에 참전 했고 스스로는 목숨을 잃었다.

24사단장 딘 소장은 부상당한 부하에게 물을 떠다 주려고 언덕 밑을 내려갔다가 적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86kg의 체중이 2개월 만에 58kg가 되었다 한다.

고풍어린 하버드대학 교내 예배당 벽에는 한국전에 목숨을 바친 하바드 출신 병사들의 이름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다.

하버드대학 졸업생중 17명이 한국전선에서 전사 하였다.

미국의 한 도시에서 한사람이 나올까 말까 하는 ‘미국의 희망들을 한국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내 보냈다.

이것이 그들의 전통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제’이다.

저작권자 © 시사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