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합병 찬성의혹 문형표 전 장관 검찰 출석
[이미영 기자]마침내 검찰이 국민연금을 향해 칼을 뽑아들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찬성표를 던진 국민연금이 ‘최순실의 입김’으로 움직인 게 아니냐는 의혹을 풀기 위해서다.

삼성은 구속기소된 최순실(60)씨 일가와 미르·K스포츠재단에 드러난 것만 300억원 규모의 자금을 건넨 것으로 파악된다.

최씨와 삼성을 둘러싼 의혹 가운데 가장 부각되는 것은 지난해 이뤄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관한 청탁 여부다.

두 회사의 합병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필수적인 지분 조정 절차로 여겨진다. '삼성물산→제일모직→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SDI→삼성물산'로 이어지는 순환 출자고리를 해소하기 위한 작업이기도 했다.

여기에 국민의 노후자금을 위탁 운영하는 기관인 국민연금공단까지 동원됐다는 의혹을 접한 시민들은 허탈해 하는 모습이다.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서 사는 이모(28·여)씨는 "국민들 혈세로 손해를 보면서까지 기업의 뒤를 봐주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다"며 "이러려고 국민연금 가입시키나 자괴감이 든다"고 토로했다.

경기 수원에 사는 양모(32)씨는 "나 같은 직장인은 내고 싶지 않아도 내야 되는 세금 같은 돈으로 저런 일을 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며 "자기 돈이라면 저렇게 했겠나. 사기업 경영권을 방어해주라고 국민연금을 낸 것이 아니다"라고 개탄했다.

검찰은 삼성이 피의자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으로 지목된 최씨 등에게 보낸 이 같은 자금이 지난해 계열사 합병에 대한 대가성이었는지 여부를 수사 중이다.

삼성은 최씨 등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을 창구로 모금한 재단 기금 204억원, 최씨와 그의 딸 정유라(20)씨에게 직간접적인 경로로 70억원 넘는 자금을 건넨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은 23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사무실과 삼성 미래전략실, 홍씨의 사무실 등을 동시에 압수수색했다.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던 문형표(60) 국민연금 이사장은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 의결하도록 강요했다는 의혹으로 소환 조사를 받았다.

이는 검찰이 삼성과 정부, 국민연금 사이의 모종의 연결 고리가 있었음을 염두에 두고 수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민연금은 표대결 양상을 보이던 당시 합병 주주총회의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다. 국민연금은 이 같은 상황에서 삼성물산 주총에서 이례적인 절차를 거쳐 합병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합병 전후인 지난 2월과 7월 이 부회장은 박 대통령을 만났고 최씨 등에게 자금을 전했다. 국민연금의 이례적인 찬성 의결은 주총 2주 전 기금운용본부장을 맡은 홍완선(61)씨가 이 부회장을 만난 뒤 이뤄졌다.

삼성 측은 최씨 등에게 내준 자금의 성격을 두고 "돈은 말 구입에 쓰였고 말은 삼성 소유"라며 "나중에 말을 매각해 나온 비용도 다시 삼성전자 쪽으로 입금 됐다"고 대가성이 아니라는 취지로 해명했다.

하지만 계열사 합병 과정의 각종 정황, 정관계 로비를 통해서라도 국민연금을 설득했어야 할 당시 상황 등을 감안하면 삼성 측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 세간의 지적이다.

 
삼성은 지난해 7월17일 핵심 계열사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합병했다. 삼성물산은 지난해 4월말부터 준비한 합병안을 5월26일 발표하고 약 50여일 만에 이를 가결했다.

문제는 1대 0.35로 산정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비율이었다. 주주들 사이에서 삼성물산이 총수 일가의 경영승계에 유리하도록 합병 가액을 과도하게 저평가했다는 불만이 제기되면서 표대결 국면이 형성됐다.

지분 7.12%를 보유한 3대 주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자사에 과도하게 불리한 비율임에도 합병안을 가결하려는 삼성물산을 이해하기 어렵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다수의 소액 주주들도 같은 목소리를 냈고, 업계에서도 규모가 큰 삼성물산이 아닌 제일모직이 흡수하는 형태의 합병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기관인 ISS(Institutional Shareholds Service)와 글래스루이스(Glass Lewis),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등도 연이어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에 불리하다며 국민연금에 반대를 권고했다.

삼성 측은 합병 성사에 필사적이었다. 삼성물산은 지난해 6월11일 KCC에 자사주 899만557주, 지분 5.79%를 처분하며 추가 의결권을 만들어 냈다. 또 찬성표 확보를 위한 비상대응팀을 꾸려 아침 회의도 않고 직원들을 밖으로 돌려 주주들의 직장과 자택을 찾게 했다.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 이를 돕기 위해 계열사 임직원들까지 동원했다. 계열사 직원 가운데 삼성물산 지분이 있는 직원을 상대로 지원 부서에서 합병 찬성을 종용하기도 했다. 한 삼성 계열사에서는 주주들을 상대로 찬성 권유를 요청해달라며 증권사 직원 등에게 5만원 상당의 화장품 세트를 줬다는 의혹도 전해진다.

이때 삼성이 계열 금융사로 하여금 삼성물산의 의결권이 있는 자산운용사들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지적이 제기돼 금융당국이 조사를 약속하기도 했다. 한화투자증권의 한 분석가가 삼성에게 불리한 보고서를 내놨다가 삭제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최근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사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화그룹에서 6월12일 김승연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 일가가 가까우니 합병에 부정적인 보고서는 쓰지말라고 했다"며 "7월8일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냈더니 김연배 (당시 한화생명) 부회장이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지 모른다고 압박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은 이 같은 상황에서 통상의 절차와 다른 방식으로 합병에 찬성하기로 의결하고 그 결과를 주총 당일 서면으로 삼성 측에 전한 것이다.

국민연금은 통상 외부 민간 자문기구인 주식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의 견해를 구해 의결권 행사 방향을 정한다. 그런데 유독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전문위 자문 없이 내부투자위원회의 결의만을 거쳐 찬성했다.

전문위는 비슷한 시기 삼성물산과 비슷한 내용으로 의결권 논란이 있던 SK와 SK C&C의 합병에 대해 주주가치가 훼손된다는 이유로 반대 의사를 밝혔던 바 있다.

이때 내부투자위를 이끌던 것은 합병에 즈음해 이 부회장을 만났던 홍씨다. 더욱이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의 손을 들어줄 경우 3000억원에 이르는 손실 우려가 있다는 점을 알고도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연금은 매달 돈을 납부하는 국민들이 보통 만 65세에 이르면 매달 일정한 금액이 받을 수 있도록 기금 규모를 유지하거나 늘려야할 의무가 있다. 국민연금이 운용하는 자금은 기본적으로 국민이 맡겨둔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에 찬성표를 던진 뒤 최근 평가액으로만 5900억원의 손실을 본 것으로 파악된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합병 찬성에 따른 평가손을 업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결과라고 항변했지만 전문 투자기관의 해명으로는 궁색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고계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사무총장은 "국민연금은 보유한 삼성물산 주식에 대한 저평가 논란이 있었음에도 충분한 문제제기 조차 않았다"며 "오히려 기관 투자자로서 합병 전 삼성물산 주식을 매도하고, 합병 이후 다시 매수하는 등 삼성 총수 일가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투자한 정황까지 보인다"고 지적했다.

김성진 변호사는 "국민에게 위탁 받은 기금을 축나지 않는 방향으로 운용해야 할 국민연금이 손해를 인지하고도 삼성 편을 들었다면 배임 소지가 있다"며 "청와대에서 국민에게 손해가 돌아갈 수 있는 방향의 지시가 있었다면 교사 또는 방조의 공동정범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변호사는 "상당한 정보력을 가진 삼성 측에서 사전에 청와대를 움직일 수 있는 핵심 비선인 최순실을 잡기 위해 정유라에 대한 편의를 주겠다면서 접근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국민연금에 영향력이 가해진 이유가 금전을 받았기 때문이라면 이를 건넨 삼성 또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철저한 수사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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