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경우 전 의원이 2009년 9월 30일 오전 여의도 자유선진당 당사에서 입당식을 갖고 의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어렸을 때 거의 대부분을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컸던 나는 유난히 아버지가 어려웠다.

그 어려웠던 아버지와 마침내 함께 살기 시작한 곳이 바로 마포였다. 나의 유년의 기억 중 또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마포에서의 생활, 그러나 이 곳에서 나는 난생 처음 아버지에게 매를 맞야야 했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잊을 수 없는 그 날, 이제 아버님는 세상을 떠나시고 나 혼자서 그 날 추억을 되새기곤 한다.

복잡한 초등학교 이력서

내가 서울을 처음 구경한 것은 세 살 때다. 바로 해방이 되던 45년도였다. 당시 아버님은 직장 때문에 서울에서 어머니와 셋방살이를 하고 계셨었는데 해방이 되자 할아버지가 내 손에 태극기를 쥐어 주고 서울로 올라오셨던 것이다.

그 곳이 어디였는지 내가 기억할 턱이 없다. 다만 당시 부모님이 사시던 곳이 마포였으니 아마 그 어디쯤이 아닐까 싶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던 기억, 나도 덩달아 내 손에 쥐어진 조그만 태극기를 흔들어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 때 잠시 다녀간 이후 내가 다시 서울로 올라온 것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할아버지는 막상 나를 떼어놓기가 아쉬웠는지 시골에서 그냥 입학을 시키자고 하셨던 모양인데 결국은 아버님의 설득으로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그 때 내가 들어 간 학교가 마포의 용강 국민학교였다. 그러다 3학년 때 전쟁이 나는 바람에 피난 갔던 인천의 신흥 국민학교에서 3학년과 4학년을 다녔다. 인천의 이모님 댁에서 다니겠다고 1년을 더 버티다 결국은 부모님이 강제로 끌고 오다시피 해서 다시 용강 국민학교로 온 것이 5학년 때. 두 번째의 전학인 셈이었다.

전쟁 와중에 왔다 갔다 한 끝인데도 꽤나 공부를 잘했던 것 같다. 반장을 한다 뭐한다 하면서 일 년을 보냈는데 마침 학교의 졸업식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또 한 번의 전학을 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 때 나는 재학생을 대표해 송사를 하게 되었는데, 불과 일 년 밖에 안다닌 학교에서 어린 꼬마가 무슨 사연을 그리도 절절히 풀어놨는지, 그만 졸업장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어버린 게 화근이었다. 어린 아들이 그래도 연단에 서서 송사를 한다 하니까 어머니도 오셔서 그 눈물바다를 지켜보시는 중인데, 옆에 앉은 학부형 한 분이 실컷 울고 나시더니 무심코 하시는 말씀이 걸작이었다.

“저런 애가 왜 용강에 다니나? 아깝네 아까워!”

혀까지 차면서 하더라는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이 말씀을 전했고, 아버지는 부랴부랴 나를 6학년이 되자마자 수송 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그 때만 해도 용강 초등학교는 시골 변두리 학교 취급을 받던 때였다. 아버지는 행여 ‘자식이 똑똑한데 그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기라도 했다.’는 듯 일류학교 취급을 받던 수송으로 전학을 시키신 것이다.

그 학부형의 말 한 마디 때문에 그날 이후 나는 고생길에 들어선 거나 다름없었다. 마포에서부터 광화문까지. 게다가 6학년이다 보니 웬 책은 그리도 많았던지, 어깨가 처질 정도의 가방을 짊어지고 가자면 말 그대로 새벽밥 먹고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곤 언제나 어둑어둑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한마디로 마포 촌놈이 수송 다니느라 퍽도 애를 쓴 것이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니까 고생스러웠겠다 싶은 거지 사실 그 대는 힘든 줄도 몰랐다. 그 먼 길을 걸어 다니면서도 한 번도 결석 지각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컴컴해져서야 집으로 오자면 버스가 서는 마포종점에서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다가 내 책가방을 받아들고 ‘애썼다’며 내 등을 토닥거려 주셨는데, 신통하게도 달리 어리광을 부리지도 않았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세 번을 옮겨 다니는 복잡한 이력서를 남기고 결구 수송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니 아마도 내가 가진 이력 중 가장 복잡한 게 아닐까 싶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마포 종점

사실 당시만 해도 마포가 촌이긴 했다. 그때만 해도 중심가로부터 한참을 벗어나 있는 변두리였고, 게다가 비만 왔다하면 잠겨 있는 탓에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다행히 집은 고지대에 있었단 탓에 괜찮았지만, 학교에 가는 길은 장마만 졌다하면 아예 집에서부터 신발을 벗어 가방에 옭아매고 맨발로 걸어야만 했다.

일 년이면 서너 차례는 꼭 잠기다보니 그에 맞는 교통수단이 안 생겨날 리가 없다. 바로 나무를 엮어 만든 일종의 땟목같은 나룻배였다. 비만 왔다하면 멀쩡한 길 위로 나룻배가 떠다닌 것이다. 당시 마포는 ‘제재소’가 유명했는데 여기 저기 제재소에서 허드레 판자를 주워다 엮어서 만든 뗏목들이 주인 없이 떠다니곤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마포하면 또 유명한 것이 바로 ‘새우젓’이었다. 그 때까지도 마포 나루터가 건재하고 있었던 탓에 늘상 나루터 주변으로는 인천 등지에서 실려 온 생선냄새가 진동을 했고 새우젓장사가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빌딩이 숲을 이룬 마포에서 옛날 얘기를 한다면 아마 젊은이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전 나는 아주 반가운 사진 한 장을 봤다. 마포 종점 부근에 있는 음식점에서 본 것인데, 음식점 이름 또한 <마포나루터>다. 그리고 그 음식점 안에 6.25전후의 마포나루터 사진 한 장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아, 마포나루터!’

나는 처음 그 음식점에 들어서면서 걸려 있는 사진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도 눈에 선한 황포돛대에 실려 오던 새우젓들. 그리고 거기에 실려 오던 바다 냄새들...그것은 어릴 적 내가 시흥의 시골집에서 협궤열차에 올라탈 때마다 ‘훅’하고 밀려오던 바로 그 냄새였다.

 서울아이와 시골아이의 차이점

나에게 유년의 기억은 시흥 할아버지 댁에서의 추억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어린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줬던 건, 서울아이들의 노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하긴 시골에서는 천지가 다 놀이터요, 온갖 것이 다 장난감인 반면 도시에서는 좀처럼 놀만한 곳도 그리고 가지고 놀 것도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 때 마포에서 유일하게 재미난 놀이는 공덕동의 철로 아래서 ‘오래 버티기’였다. 공덕동에는 당시 다리 위로 철로가 놓여 있었는데, 몇 놈이서 ‘가자’하고는 일단 그 곳까지 달려간다.

도착해서는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놈이 다리 위에 올라가서는 그 난간을 타고 다리 아래에 붙는다. 바로 철로의 철판 아래로 달라붙는 것이다. 그리고는 기차가 올 때까지 매달린 채 기다린다. 그 때 기차는 증기식이어서 달릴 때면 규칙적으로 증가를 뿜어내게 되었는데 꼭 그 철로 위를 지날 때면 ‘확!’하고 증기를 뿜어내곤 했다.

우리의 놀이터라는 건 대단한 게 아니다. 바로 그 철로 아래에 매달린 채 뜨거운 증기를 맞으며 오래 버티는 것이다. 뜨겁기는 하지 석탄가루는 날리지... 그 속에서 기차가 다 지나가도록 버텨야만 하는 것인데, 어쩌다 유난히 긴 기차라도 지날 양이면 정말 ‘죽는구나’싶어진다.

된통 당하고 내려오면 다시는 안하겠다.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다시 며칠 지나면 또 하게 되는데 바로 그 놀이였다. 스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 외에 달리 놀 것이 그리 많지 않았던 탓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위험천만한 곳에서 재미나다며 놀 수밖에 없는 것이 서울과 시골의 차이였다. 그러나 그런 놀이 또한 아버지의 엄포 한 마디와 함께 끝을 내야만 했다.

그런데 나는 얼마 전에 마포에 조그만 사무실 하나를 세 얻어 들어갔는데 막상 들어가 놓고 보니 바로 그 공덕동 로터리가 훤히 바라보이는 게 아닌가! 정말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옛날의 흔적을 찾아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변했지만 지금도 뿌연 서울 하늘 아래로 나는 그 모습을 선명하게 그려 낼 수가 있다. 잠깐씩 창문을 열고 옛날의 추억에 잠겨보는 것이 요즘 나에겐 큰 즐거움이 되고 있다.

아버지의 두 모습

아버지는 양정고등학교 재학시절 유명한 럭비 선수였다고 한다. 대대로 유학의 가풍을 지켜 온 가계이고 보면, 그 후손이 선택한 운동치고는 너무 서구적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꽤나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나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두 가지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하나는 매우 엄격한 모습이다. 정작 할아버지보다도 더 엄격하셨던 것 같다. 훗날 생각해 보니 그것은 아마도 공무원으로 젊을 때부터 객지로만 떠돌아야 했던 아버지의 삶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아는 사람 없다고 흐트러질까 미리 그렇게 단도리를 하셨던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나와 동생들에게는 그렇게 엄하셨던 분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바로 친구 분들과 만날 때였다. 아버지는 직장 생활을 오래 하셨으면서도 언제나 집으로 찾아와 만나는 친구는 고등학교 때 친구 분들이 유일했다.

아버지의 친구 분들은 다름 아닌 마라톤의 손기정 선수,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던 김영상 선생, 그리고 또 한 분은 당시 임택근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라디오의 스무고개 프로그램에서 단골손님으로 출연하던 문제안 박사였다.

이 네 분이 모였다 하면 그 날은 밤을 새는 날이다. 어떤 날은 서로 상대방의 아내가 계수시라고 우기는 것으로 하룻밤을 꼬박 새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무슨 욕시합이라도 하시는지 대단한 욕쟁이 아저씨로 변신해 또 하룻밤을 꼬박 새기도 하셨다.

나는 그렇게 네 분이서 나누는 얘기 속에서 아버지의 별명이 ‘나까우리’라는 것을 알았다. 학창시절 중절모 비슷한 ‘나까우리’라는 모자를 어찌나 지성으로 쓰고 다니셨던지 그 별명이 붙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또 잊을 수 없는 얘기는 ‘나무꾼과 선녀’얘기다. 손기정 선수의 사모님은 수영선수였는데 손기정 선수가 하루는 수영장에서 그 분의 옷을 훔쳐와 버렸다고 한다. 그 후로 결국 두 분이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말 그대로 나무꾼과 선녀인 셈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 얘기도 그 때 들었다. 당시 아버지는 무슨 시합이 있어 안성에 갔다고 한다. 그 곳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딸 부잣집’얘기를 듣게 되었는데 그 다음 날로 무작정 그 곳을 찾아갔다 한다. 그리고는 대뜸 ‘내가 큰 아들이니 큰 따님을 저에게 주십시오! 했다는 것이다.

외할머니 댁 역시 안성에서는 내노라하는 한학자 집 안이었는데 웬 총각이 나타나서는 딸을 달래니 오죽 황당했을까. 그러나 다행히도 아버지의 그 기세가 외조부님의 눈에 들었는지 ‘집 안을 통해 사람을 넣게!’하며 조용히 내치셨다고 한다. 그 얼마 후 아버지는 그 말씀대로 했고 그렇게 해서 두 분이 만나셨다고 한다.

네 분이 만나면 혈기왕성한 청년시절의 무용담은 그 밖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나 친구 분들이 돌아가시고 난 후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예전의 아버지로 돌아오곤 했으니 그 와중에 터진 것이 바로 교회사건이었다.

난생 처음 매를 맞다

엄하시긴 했어도 자식들에게 매를 들어본 적은 없는 아버지였다. 그런데 마포에 살 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매를 맞았다. 바로 크리스마스이브 날이었다. 사실 시골에 있을 때는 크리스마스가 뭔 줄도 몰랐던 나로서는 교회에 간다며 뭉쳐 다니는 모습이 여간 재미나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교회에 갔다 온 애들이 저마다 선물 하나씩을 들고 와 자랑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몇 몇을 따라 몰래 교회에 갔다. 교회를 다녀라, 다니지 마라, 이런 얘기는 한 번도 없었지만 어린 나이에 그래도 몰래 갔던 걸 보면 뭔가 분위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째든 교회에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선물가지 받아들고 집에 돌아오는데, 막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아버지의 호통과 함께 매를 맞기 시작했다.

워낙에 처음 당하는 일이라 나도 모르게 반항하고 말았으니 더 혼쭐이 날 수 밖에! 아무튼 그 이브 날 저녁 나는 일생 일대 처음으로 남에게 그것도 아버지에게 매를 맞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꼭 교회가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젊어서부터 객지살림을 하셔야 했던 아버지는 자식이 행여 아는 사람 없다고 함부로 나댈 새라 언제나 노심초사 하셨고 그 와중에 교회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게다가 12시가 가까워 오도록 소식도 없이 들어오지 않는 어린 아들을 기다리면서 별 생각을 다 하셨을 터이고, 그 끝에 교회가 그야말로 아무 죄 없이 걸려 든 것이다.

아버지 역시 나중에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셨고,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성경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나는 나대로 독실한 신자였던 아내를 만나 자연스럽게 교회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벌어졌던 그 날의 사건만큼은 지금도 빙그레 웃음이 번져 나오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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