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기자]때론 어린시절의 기억이나 환상이 현실의 정신과 행동을 지배하기도 한다. 그것은 표현은 말이다.

지금 청와대 관저를 걸어 잠그고 국민에게 맞서 항전하고 있는 대통령이 1일 뜬금없이 기자간담회를 자처했다. 그 이유와 목적은 차치하고 더 관심이 쏠린 것은 장황한 대통령의 말이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의 말을 분석해 온 최종회 언어와생각 연구소 소장이 3일 한 방송에 출연해 박 대통령 어법을 분석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마디로 박 대통령의 어법은 “괴상망측하다”는 것이다.

최 소장은 박 대통령 화법의 가장 큰 특징에 대해 “진실과는 거리가 먼 말들”이라면서 “진실과 거리를 둔 말을 언어성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정치가들이 언어성형을 하기는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에는 정도가 심하고 양이 많고 반복되고 습관적이라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솔선을 수범해서’, ‘지하경제를 활성화하고’ 등 박 대통령의 어법에 대해 “말 전체가 그럴듯해 보이면 그걸 그대로 흡수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이 아주 심하다”면서 “그래서 솔선수범이라는 낱말 뜻을 정확히 알지를 못하고, 그럴듯 하니까 그것을 ‘솔선을 수범하고’로 늘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 소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어법을 ‘영매 어법’이라고도 평가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어법이) 최태민교에서 직접 영향을 받으신 것이기도 하다”면서 “우주, 정성, 혼, 마음, 일편단심, 정신, 기운 등 최태민 씨가 애용하던 낱말이 지금 박근혜 대통령의 어법 속에 그대로 들어있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 ‘유체이탈 화법’으로 지적받는 것에 대해서는 “자기가 가장 높은 사람, 심지어는 ‘자기는 잘못하지 않는다’는 무오류의 착각까지도 젖어있는 사람이다 보니까 책임질 줄 모르고, 책임을 느끼지 못하니까 사과할 줄 모르는 것”이라면서 “사과할 줄 모르니까 책임을 다른 쪽으로 전가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청와대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그 분에게는 비극적이었다”면서 “수평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 연습, 훈련 과정이 생략되다 보니까 일상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토의나 토론 같은 것을 할 수가 없다. 그런 것을 오히려 일찍 깨달은 분이 육영수 여사다. 그래서 ‘청와대에만 갇혀 지내면 바깥 생활, 언어를 익힐 기회가 없구나’해서 그 분이 틀어준 게 TV 드라마”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정신세계는 어떨까

박근혜는 10살 때 청와대에 들어가 27살 때까지 18년을 살았다. 자아가 형성되고 확고해지는 결정적인 시기를 권부의 한가운데서 ‘공주’로 지냈다. 22살 때부터 5년 동안은 절대권력자의 퍼스트레이디 노릇까지 했다.
'박근혜에게 청와대는 어린 시절 뛰놀던 집이고 젊은 날의 영광이 깃든 마음의 고향'이라는 것이 고명섭 한겨레 논설위원의 말이다.

고 위원의 글을 좀더 인용하면 아버지의 난데없는 죽음으로 그 고향을 떠나 바깥에서 보낸 세월은 박근혜의 의식 속에선 풍찬노숙의 타향살이였을 것이다. 대통령이 돼 34년 만에 청와대로 들어간 것은 꿈에도 그리던 집에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청와대는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되찾은 집이라는 것이다.

더 들어가 보면 박근혜에겐 청와대가 자기 집일 뿐만 아니라 이 나라 전체가 자기 집이다. 박근혜의 환상 속에서 이 나라는 아버지 박정희가 세우고 키운 나라, 박정희의 나라다.

“저는 외환위기 사태를 당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망할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에 가만히 있어도 울컥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박근혜가 1998년 정치에 뛰어들고서 한 말이다. 이 나라는 아버지가 만든 나라이며 박정희야말로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드러나 있다.

피와 땀을 흘려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진짜 주역인 국민은 박근혜의 안중에 눈곱만큼도 없다. 국민은 아버지의 시혜를 받은 백성, 피지배자에 지나지 않는다. 유신독재의 폭정도 떼쓰는 백성에게 들이댄 엄한 아버지의 회초리였을 뿐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아버지의 업적 위에 서 있다는 것이 박근혜의 의식 저층에 깔린 믿음이다.

결국 박근혜 입장에서 이 나라 현대사는 아버지의 역사라는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아버지의 역사와 유산을 온전히 물려받은 사람, 말하자면 ‘장자상속권’을 쥔 사람이 바로 박근혜 자신이다. 이 상속권에 따라 아버지의 나라는 박근혜의 나라가 된다.

박근혜의 눈으로 보면, 재벌도 아버지가 만들어 키운 것이고 아버지가 이룬 업적의 한갓 수혜자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재벌들이 가진 돈을 좀 가져다 쓴 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어차피 재벌도 내가 소유한 이 나라의 일부일 뿐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박근혜의 마음에 미르재단 따위를 만들어 돈을 갈취한 것이 범죄가 된다는 의식이 있을 턱이 없다. 아버지가 만든 나라의 상속자이자 주인으로서 박근혜는 홀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문고리 3인방은 말할 것도 없고 수족처럼 부린 안종범·우병우도 미천한 아랫것들일 뿐이다. 국무총리조차도 ‘문자로 면직 통고를 해도 되는’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시사저널>이 보도한 김종필의 말은 정곡을 찌른다. “한마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야. 저 혼자만 똑똑하고 나머지는 다 병신들이야.”

고명섭 위원은 "박근혜는 반성할 줄 모른다. 위기에 몰리면 가짜 눈물을 흘리거나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는 척하지만, 조금만 국면이 느슨해지면 본래의 자기로 되돌아간다"고 말했다.

시인 김수영이 <절망>이라는 시에서 말한 대로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결코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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