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혜 기자]‘사람이 죽었으나 살인자는 없었던 사건….’ 그 유명한 ‘이태원 살인사건’이 20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대법원이 25일 아더 패터슨(38·당시 18세)<사진>을 진범으로 인정하면서다. 20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살인자를 찾아낸 것이었다.

'이태원 살인사건'의 진범 아더 존 패터슨에게 범행 20년 만에 징역 20년이 확정됐다. 징역 20년 형은 범행 당시 미성년자였던 패터슨에게 내릴 수 있는 법정 최고형.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25일 살인 혐의로 기소된 패터슨의 상고심에서 징역 20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칼로 찔러 살해한 사실이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증명됐다고 본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범인은 자신이 아니라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친구 에드워드 리라는 패터슨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이어 이 사건의 공소 제기가 공소권 남용에 해당한다는 주장, 징역 20년이 너무 과하다는 주장도 기각했다.

영화로도 재현됐던 살인자 없는 살인사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걸까?

1997년 4월3일 오후 10시쯤.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 홍익대 학생 조중필씨(사건 당시 22세)는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는 길에 햄버거 가게에 들어갔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화장실을 갔다 온다고 자리를 비운 조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내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흉기에 목과 가슴을 9차례 찔렸다. 어처구니 없고 허망한 죽음이었다. 소변을 보던 조씨는 왼쪽 목 부위 네곳, 오른쪽 목 부위 세곳, 가슴 부위 두곳 등 9곳을 흉기에 찔렸다. 119가 출동했으나 조씨는 이미 숨진 뒤였다.

그러나 조씨의 모국인 한국은 살인자를 찾아내지도, 이를 제대로 벌하지도 못했다. 수사 초기엔 현장에 있었던 주한미군 아들 패터슨과 교포 에드워드 리(38·당시 18세)가 있었다. 둘은 서로가 범인이라고 지목했다. 책임 떠밀기였다.

경찰 조사에서 리는 “한국 남성이 화장실에 들어가자 패터슨이 따라갔다. 얼마 뒤 나와서는 ‘내가 일을 저질렀다’고 했고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그럼 가서 직접 보라’고 했다. 가서 보니 사람이 죽어 있더라”라고 진술했다.

반면 패터슨은 “내가 주머니칼을 자랑하며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고 리가 칼을 가져간 뒤 ‘뭔가 보여 주겠다’며 리가 화장실에서 한 남성을 찔렀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은 리를 범인으로 보고 살인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패터슨에게는 증거인멸과 불법무기소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리는 1997년 10월2일 서울지법과 1998년 1월26일 서울고법에서 살인죄가 인정돼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98년 4월24일 대법원은 리에게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려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패터슨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스러워 리가 단독 범행을 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1998년 9월30일 서울고법은 리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리는 풀려났다.

리가 무죄로 석방되자 조씨 가족은 패터슨을 살인 혐의로 고소했다. 검찰은 다시 수사에 착수했다. 패터슨은 1998년 1월26일 서울고법에서 증거인멸 등 혐의로 징역 장기 1년6월 단기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같은 해 8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검찰은 패터슨을 출국금지하고 수사해오다 1999년 8월 인사이동 과정에서 사흘 동안 출국금지를 연장하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이 틈을 타 패터슨은 미국으로 도주했다. 수사는 중단됐다.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던 이 사건은 한편의 영화로 다시 주목받게 됐다. 2009년 9월 조중필씨 사건을 다룬 홍기선 감독의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이 개봉했다. 배우 정진영씨가 담당 검사, 장근석씨가 패터슨, 송중기씨가 피해자 조중필씨 역을 맡아 연기했다. 이 영화로 인해 검찰에 대한 비난 여론과 함께 재수사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들끓었다.

검찰은 재수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최신 수사기법을 동원해 패터슨이 진범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문제는 패터슨이 이미 미국으로 돌아가 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검찰은 2010년 1월 미국에 패터슨을 송환해 달라는 ‘범죄인 인도’를 요청했다. 이어 2011년 12월 공소시효(15년) 약 3개월을 앞두고 패터슨을 공석 상태로 기소했다.

미국 검찰은 2011년 5월 패터슨을 체포해 구속 수감했다. 그는 3차례 보석을 청구했지만 미국 법원은 이를 모두 기각했다. 한국의 범죄인 인도 청구를 1년여 동안 심리한 미국 LA연방법원은 2012년 10월 패터슨의 한국 송환을 결정했다. 그러나 패터슨은 미국 캘리포니아 연방법원에 인신보호청원을 냈다. 한국 송환 결정이 부당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2013년 6월 법원은 패터슨이 낸 인신보호청원 1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패터슨의 한국 송환을 결정한 판결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25일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살인 혐의로 기소된 패터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사건 발생 20년 만이었다. 패터슨이 국내로 송환돼 새로 재판이 시작된 지 1년 반 만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물두살 조씨의 시계는 1997년 4월3일 밤 10시5분에 영원히 멈춰져버린 터였다.

그의 죽음은 충동적이고 우발적인 미군 아들의 범죄로, 사건 초기 한국 사법기관의 안일함으로, 그리고 불평등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조항들로 인해 더욱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젊은 청년의 삶은 이날 대법원 확정 선고로도 회복될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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