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혜 기자]피살된 김정남은 한때 김정일의 후계자로 '후계 수업'까지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 김정일의 눈 밖에 나서면서 '비운의 황태자'로 불리며 해외를 떠돌다가 돌연 생을 마감하게 됐다.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열등감 때문에 김정남을 ‘눈엣가시’로 여겨 암살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김정은의 어머니는 재일교포 출신으로 북한여성이 어머니인 김정남과 그 출신이 비교되기 때문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그의 첫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 김정남은 2000년에만 해도 김정일을 이을 후계자로 지목됐다.

1971년 5월 10일 평양에서 김정일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정남은 어려서부터 김정일의 후계자로 거론되며 황태자의 자리를 누렸다.

80년대 모스크바를 거쳐 스위스 제네바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뒤 북한으로 돌아온 김정남은 요직을 맡기 시작했다. 북한이 강조하는 '백두혈통'(김일성 직계 혈통)인 김정남은 1988년부터 당시 국가보위안전부에 근무했고, 1998년 부부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컴퓨터광'답게 1998년부터 북한의 IT정책을 주도하는 조선컴퓨터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또 김정일의 직접 지시를 받는 무기 수출 총책임자이자 김정일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39호실의 책임자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1995년에는 인민군 대장 계급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김정일의 후계자로 거론되며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김정남은 해외 유학을 거치면서 국제적 감각이 있다는 평가와 함께 개혁·개방주의자로 불렸다. 하지만 그의 이런 성격은 북한 내에서 약점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6년 그의 이모 성혜랑이 미국으로 망명한 뒤 그의 북한 내 입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자유분방한 성격과 잦은 돌출 행동으로 결국 김정일의 눈 밖에 났다.

그러던 결정적으로 2001년 5월, ' 일본 나리타공항 밀입국 미수사건'으로 김정남은 후계 구도에서 밀려났다. 당시 김정남은 아들과 2명의 여성을 대동한 채 도미니카 가짜 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 체포됐다.

 
김정남은 조사에서 관광차 일본에 왔다며 도쿄 디즈니랜드에 갈 예정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체포된 그의 얼굴이 언론에 공개됐고, 김정일은 그가 국제적 망신을 샀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일본 밀입국에 실패한 뒤 중국으로 추방된 김정남은 이후 중국과 마카오 등을 전전했다.

그리고 2008년 여름 김정일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직후, 맏아들 김정남이 아닌 막내아들 김정은에게 권좌를 물려줬다.

이 소식에 김정남은 2009년 1월 중국 베이징에서 만난 외신기자들에게 "후계 구도는 아버지가 결정할 문제"라며 자신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점을 애써 강조하기도 했다.

김정은 정권에서 김정남은 항상 첫 번째 표적이었다. 김정남이 북한의 2인자로 군림하던 고모부 장성택의 비호를 받는 데다가, 북한 내에서 여전히 그를 따르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에서 아래로 보는 재일교포 출신의 어머니를 둬 이른바 '째포(북한에서 재일교포를 부르는 말) 콤플렉스'가 있는 김정은 입장에서 김정일의 맏아들 김정남은 위협적이었을 거라는 분석이다.

국가안전보위부를 장악한 김정은은 2009년 4월, 평양의 김정남 거점이었던 우암각을 습격하면서 본격적인 제거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자 김정남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생 김정은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중국 마오쩌둥조차 세습을 하지 않았다"며 '북한 3대 세습'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웠다.

인터뷰 이후 중국과 오스트리아 등에서 김정남에 대한 본격적인 암살 시도가 이어졌다. 암살 지시를 내린 건 당시 정찰총국장이었던 김영철로 전해졌다.

김정남은 아버지 김정일이 2011년 사망한 뒤 김정은이 북한의 최고 권력을 장악하자, 이복동생의 위협을 피해 해외를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김정은이 두려워 아버지 김정일의 장례식조차 가보지 못했다.

고모부 장성택과 고모 김경희의 지원으로 생활을 이어나가던 김정남은 동생 김정은과의 관계 회복을 꾀하기도 했다.

2011년 1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생이 후계자로서 북한 주민을 윤택하게 해주길 진심으로 바란다"며 "동생이 제 진심을 이해할 수 있는 도량 큰 인물이라 믿는다"고 말한 것.

2012년 4월에는 김정은에게 '저와 제 가족을 살려달라'는 서신을 발송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2013년 12월 후견인이었던 고모부 장성택이 처형되면서 김정남의 마지막 방패도 무너졌고, 이후 '망명설'도 돌았다.

또 장성택 숙청 이후 돈줄이 막힌 김정남이 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돈을 받고 정보를 건네는 등 거래를 하다가 김정은에게 밉보였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결국 김정남은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신원 미상의 여성 두 명에게 독살당했다. 범행 수법으로 미뤄 전문가들은 북한의 소행이 유력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세계의 눈은 또 다른 '백두혈통',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로 쏠리고 있다. 김정일의 맏손자인 김한솔은 2012년 10월 핀란드 yle-TV와의 인터뷰에서 김정은을 '독재자'라고 말해 주목받았다.

김한솔은 2013년 12월 프랑스의 명문 르아브르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에서 포착된 것을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행적이 묘연한 상태이다.

 
아사히신문 기자가 기억하는 김정남

한편 피살된 김정남과 가까웠던 일본 아사히신문의 기자는 그를 '박식하고 온화한 성격을 소유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15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지난 2008년 베이징공항에서 김정남을 취재한 뒤 10년 가까이 연락을 이어온 미네무라 겐지(峯村健司) 기자(현 워싱턴 특파원)는 작년 2월 김정남과 메신저 앱에서 영어로 나눈 대화 내용을 공개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겐지 기자가 공개한 대화창 캡처사진에 따르면, 당시 김정남이 먼저 겐지에게 새해 인사를 전했고 겐지가 김정남에게 새해인사와 함께 자신의 상황을 전했다.

2008년 아사히신문 베이징총국 소속 기자였던 겐지는 평양에서 돌아오는 김정남을 베이징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말을 걸었던 적이 있다. 이후 겐지는 김정남과 가끔 연락을 주고 받았고, 두 사람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김정남은 마카오의 한 식당에 겐지를 초대하기도 했다. 겐지는 김정남이 술자리에서 상대방의 술잔이 비면 먼저 채워주고, 음식점 여직원들과 농담을 주고 받기기도 하는 장난스러운 면도 있다고 기억했다.

겐지는 김정남의 능통한 영어실력과 박식함, 객관적인 시각에 놀랐다고 밝혔다. 김정남과 북한 정치부터 경제, 환경 문제까지 광범위한 범위의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는 것이다.

겐지는 지난 13일(워싱턴 현지시간) 김정남의 사망 소식을 전해듣고 그에게 황급하게 전화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고 자신이 보낸 메시지도 확인하지 않더라고 밝혔다. 또 올해 새해에 김정남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지지 않았던 사실이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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