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7월 27일 오후 세계인이 함께하는 지구촌 문화올림픽 가평세계캠핑대회 '대한민국 전통무술 경연대회'를 정진구 군의회 의원, 이진용 가평군수, 김선교 양평군수. 서효원 제2행정부지사, 장경우 대회조직위원장(오른쪽 부터)이 대회를 관전 하고있다.
 

"나의 학창시절을 말할 때 ‘운동’을 빼놓고 말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대학시절까지도 이어지는데 그렇다고 내가 무슨 유명한 운동선수였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종목을 곧잘 하긴 했지만 어느 한 종목에서 빼어난 실력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언제나 체육부 소속이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터진 사건으로 짐짓 ‘복수‘를 꿈꾸며 석 달 동안이나 비장한 결의를 다지던 일까지... 지나 놓고 생각하니 그 언저리 어디쯤에서 나의 사춘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체육시간의 표본

내가 운동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도 따져놓고 보면 앞에서 얘기 했던‘용강 초등학교에서의 눈물바다’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억지 춘향식으로 수송국민학교에 전학을 오고부터 내 기는 어지간히 죽어버렸고 그 때 발견한 출구가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내가 수송국민학교에 오면서 맨 처음 놀란 것은, 모든 애들이 하나같이 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과 모든 애들이 하나같이 다 부잣집 아이들이라는 것이었다. 노는 것으로나 공보로나 남에게 별로 뒤져 본 적이 없는 나에게 그것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것은 경기 중학교에 입학하고도 마찬가지였다.

평생을 공무원으로 살아오신 아버님은 신기할 정도로 돈과는 거리가 먼 분이셨다. 그러기에 특별히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자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중학교에 들어서는 아버지의 지위가 과장급이 되면서 집도 체부동으로 옮기고 꽤 안정적인 기반을 다진 후였지만 그래도 우리 집의 형편에 비추어 볼 때 대부분의 아이들은 대단한 부자였던 것이다.

말 그대로 어지간히 기가 죽어버린 나는 그 때부터 내가 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얌전해졌다. 무엇보다 공부에 바쳐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세상이 비좁다는 듯 거침없이 날뛰던 성격이 어디로 가겠는가, 내 기는 어디로든지 발산되어야만 했고 그 출구가 바로 운동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그 때 매우 건장한 편이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키도 굉장히 큰 편이었는데 지금 키가 중학교 3학년 때의 키다. 이미 중학교 때에 키가 다 자라버린 것이다. 그러다보니 다른 애들보다 운동을 잘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춘 셈이었고, 체육시간이면 선생님들은 나를 앞에 세워놓고 ‘표본’삼아 시범을 보이곤 했다. 이른바 ‘체육시간의 표본’이 된 것이다.

내가 체육시간의 ‘표본’이 된 것은 ‘핏대’선생님 영향도 컸다. 중학교 2학년 때 체육선생님의 별명이 바로 ‘핏대’였는데 이 선생님이 내주시는 방학숙제가 바로 ‘아령’운동이었다. 그래서 개학이 되면 체육시간에 웃옷을 벗기고 얼마나 상체가 발달되었는지로 점수를 매기시는 것이었다. 나는 원래 체격이 건장한데다 아령운동까지 했으니 체육시간의 표본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면서 나는 기계체조를 학교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내가 기계체조를 시작한 것은 ‘핏대’선생님의 후임으로 새로 오신 ‘김기환’선생님 때문이었다. 김기환 선생님은 육사의 교관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초 기계체조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참가했다고 해서 유명한 분이었다.

김기환 선생님은 오시자마자 각 반에서 아이들을 뽑아 ‘기계체조반’을 구성했다. 이미 체육시간의 표본으로 체육관에서 주름을 잡던 내가 제1순위로 뽑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기계체조로 학교 대표선수가 되었다. 그렇다고 우리 대표팀이 무슨 대회에 참여해 우승을 해 본 적도 없으니 말 그대로 ‘우물안 개구리’인 셈이었지만 그래도 꽤나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기계체조 때문에 나는 엉뚱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문제아가 따로 있나?

기계체조 대표팀에 뽑힌 이 후 나의 체육관 출입은 더 잦아질 수 밖에 없었다. 틈만 나면 달려가서는 철봉대나 평행봉에 매달려 있기 바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하루종일 ‘구르고 매달리고 돌고 물구나무 선 채 거꾸로 서 있기’가 일이었다.

나중에는 집에서도 운동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일요일 하루는 부모님이 집을 비우신 사이 마당에 평행봉을 만들었다. 시멘트 한 포를 사다가 두 개의 막대를 심어 놓은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래도 평행봉 역할을 해내기에는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부모님이 돌아오셔서 마당에 심어진 그 평행봉을 보시고는 질겁을 하셨다. 나는 무심결에 방향을 잡은 것인데, 공교롭게도 평행봉의 두 개의 막대가 똑마로 대청마루를 향해 있었던 것이다. 일단 마당을 차지하고 있는 모양이 보기도 싫을 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두 개의 막대기가 똑바로 그것도 감히 대청마루를 향해 있으니 상서롭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당장 뽑아내라 호통을 치시는데, 이미 굳어버린 시멘트를 떼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걸 핑계 삼아 떼를 써가며 버티기로 나갔다. 결국은 아버지도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두 개의 막대기에 불과하다는 걸 받아들이셨다.

그 이후부터 나는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틈만 나면 매달려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흔히 기계체조 선수들이 키가 크지 않는다는 통념대로 나 역시 그 때 이후로는 키가 크질 않았다. 어쨌거나 그 때는 그런 걸 생각 할 리도 없었고,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철봉대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만 그것이 화근이었다. 매일 먹고 나면 거꾸로 매달리고, 또 한참 클 때인데다 운동을 많이 했으니 그만큼 많이 먹게 되었고, 그것이 그만 위장병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가벼운 소화불량으로 그 다음에는 위하수 증세를 보이더니, 나중에는 위 무력증으로, 급기야는 십이지장궤양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그 만할 때의 남자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어디가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왠지 엄살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혼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병을 키운 것이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증세가 꽤나 심각해졌다. 공부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던 것이다. 특히 이 위장병이라는게 신경을 쓰면 더 아프기 마련이다. 그러니 수학시간에 머리만 쓰려했다하면 어김없이 속이 쓰려오는 것이다. 한참 수학공식과 씨름하며 공부해야 할 나이에 얻은 병치고는 너무 어울리기 않는 병이었던 셈이다.

이 속쓰림은 공복시에 더 아파오기 때문에 나는 치료의 한 방편으로 가방에 항상 우유와 비스켓 같은 것을 넣고 다녔다. 특히 그 ‘처방’이 필요한 때는 수학시간이었다. 속이 끊어질 듯 쓰려오기 시작하면 몰래 우유를 꺼내 먹거나 비스켓을 꺼내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들키기 마련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짓이다 싶지만 그 때는 왜 또 그렇게 ‘아파서 그런다’는 말이 하기 싫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꼭 변명처럼 들릴 것 같고, 그것은 남자애로서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으로 꽉 절어 있었던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그 된서리를 다 맞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솔직히 ‘체육시간의 표본’으로 그렇게 건장한 내가 아프다고 해서 믿어 줄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았고, 아무튼 나는 단 한번도 그 비스켓과 우유의 ‘용도’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런 저런 와중에 뭘 몰래 먹다가 들키는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어느 새 ‘문제아’처럼 되어버렸다.

이상하게 그렇게 도자 더 반항심이 생겨났다. 한창 사춘기 때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마침내 고등학교 때에 웃지 못 할 해프닝까지 벌이는 ‘악동’으로 발전하는 뿌리가 되었다.

준비만 하다 끝나 버린 복수혈전

그 즈음 해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터졌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나는 한바탕 운동을 끝내고 수평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마 눈까지 감고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정원일’이라는 아이가 다가와서는 중요한 부분을 건드리면 짓궂은 장난을 친 것이다.

나는 펄쩍 뛰어내려서는 냅다 그 친구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그리곤 보나마나 뻔한 순서다. 그러나 뭐로 보나 질 내가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 정원일이라는 친구도 크게 반항하지 않아 싸움은 일방적인 나의 승리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정작 일은 그 다음에 터졌다.

의기양양 가방을 챙기는데 갑자기 친구들이 다가와서는 ‘너 큰일났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정원일이라는 친구는 유급생이었다. 나와 같은 학년이기는 했어도 한 학년을 유급한 상태로 선배였던 셈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게 대수냐!’는 식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싸움을 건게 정원일이었고 또 내심으로는 설령 무슨 일이 벌어진다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날 수업을 마치고 막 학교 대문을 나서는 순간 열 댓명의 선배들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곤 대뜸 날라 오는 주먹! 이유는 단 하나 선배에게 대든다는 것이었다. 말 한 마디 대꾸할 틈도 주지 않았다. 기습공격에 그것도 열 댓명이나 되는 숫자 앞에서 당한 일이었다. 결과는 보나마나다.

하여튼 그 날 나는 거의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그 모습으로는 도저히 집에 들어 갈 수도 없을 정도였다. 공부 핑계를 대고 친구 집에서 자고 간다는 연락만 드린 채 친구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만 했다. 한창 사춘기 때인데다 남에게 져 본 적이 별로 없던 나였으니 심정이 어떠했으랴.

공부고 기계체조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오직 하나 ‘복수하겠다’는 비장한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막싸움 식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뭔가 체계적으로 ‘때리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다.

밤 새 ‘비장한 결의’를 다진 나는 그 다음 날로 권투 도장을 찾았다. 당시 권투스타였던 강춘원이 운영하는<강춘원 권투도장>이었다. 그리곤 망설일 것 없이 전 재산을 털어 등록금을 내고 권투 도장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부모님을 물론 친구들 중 그 누구도 모르게 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의 비장한 복수전은 생각처럼 쉽게 풀려나가지 않았다. ‘때리는 방법’을 배우러 간 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장에서는 일주일 내내 줄넘기 같은 운동만 시키는 것이다. 줄넘기라면 이골이 난 나였다.

그래도 꾹 참고 한 일주일 버텼는데 이제는 새도우 훈련이라는 것만 또 죽어라 시키는 것이다. 권투장갑은 아예 끼어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한 달쯤 다녔을까 하루는 용기를 내어 항의를 했다.

‘나는 권투를 배우러 왔지 체력훈련 하러 온 것이 아니다. 도대체 권투는 언제 가르쳐 주느냐.’

내 당돌한 항의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훈련을 시키던 사람은 선뜻 권투장갑을 내어주고는 링에 올라가 보라고 했다. 처음 끼어보는 권투장갑이었다. 그런데 그 권투장갑은 연습용으로 유난히도 크고 무거웠다. 그러나 그게 어딘가 감지덕지 하며 마침내 링에 올라섰다.

초반 몇 초는 제법 폼도 잡아보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권투의 기본도 모르던 나는 결국 막싸움 식으로 나가고 말았다. 게다가 그 놈의 장갑은 또 왜 그렇게 무겁던지...상대방은 흡사 씨름이라도 하는 듯이 엉겨붙는 나를 떼어 내기에 바빴다. 그리곤 누군가 올라와서 나를 떼어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내려와서 보니 내가 버틴 시간은 겨우 1분이었다는 것이다. 3분도 훨씬 넘는 아주 긴 시간을 싸운 것 같은데 막상 내려와 보니 겨우 1분이었던 것이다. 겨우 1분이라니...나는 그 사실에 그만 기가 질려 버렸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 그 뒤로도 바로 그만 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날의 사건 이후 권투를 하면 할수록 이 권투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선 다른 걸 포기해야 할 만큼 권투는 간단치가 않은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런 저런 것을 배워가며 석 달을 다녔다.

그런데 그 즈음 문득 되돌아서서 생각해 보니 나의 비장한 각오는 온데 간데 없어진게 아닌가. 결국 아무도 모르게 나가던 권투도장을 나는 떠 아무도 모르게 슬그머니 빠져 나오고 말았다. 정말 신나게 두드려 맞기만 하다가 석 달간의 복수전을 맥없이 마감한 것이다. 다 사춘기의 터무니없는 자존심이 만들어 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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