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기자]12일 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서울 삼성동 사저에 도착해 웃는 모습으로 지지자들을 맞았지만 집에 들어가는 순간. 화장한 얼굴이 거멓게 될 정도로 울었다고 한다. 승복하겠다는 말도 없었다.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박 전 대통령은 10일 오전 11시21분 헌법재판소가 파면을 선고하기 직전까지도 '기각' 결정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은 박근혜 전 대통령은 최소한 탄핵 판결 하루 전까지 기각을 확신한 듯하다고 전영기 칼럼니스트는 13일 중앙일보에 밝혔다.

그날 밤 4(인용):3(기각):1(각하)이나 5(인용):2(기각):1(각하)이 나오리라는 구체적인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의 사적 인맥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다. 대통령직 복귀를 예상하고 황교안 총리를 비롯해 민정·정무수석의 교체 등 정국 전환의 밑그림까지 구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자신에게 기각 정보를 제공 혹은 보고한 Q씨의 지위와 위상에 비추어 그를 철석같이 믿었다. 결과가 정반대로 나오자 Q씨에게 극도의 배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어 전 칼럼리스트는 박근혜를 미망에 빠뜨린 또 다른 인물이 있다면 김평우 변호사일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중간에 대통령 변호인단에 끼어들었다. 가망이 없는 각하론을 끄집어 냈다. 각하론은 탄핵안을 가결한 국회의 의사결정에 하자가 있어 헌재가 심리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2004년 노무현 탄핵판결문엔 “국회는 폭넓은 자율권을 가지므로 그 판단에 헌법재판소가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명시돼 있다. 처음부터 각하론은 적용될 여지가 없었다. 명민한 김평우가 치열한 다툼이 가능했던 기각론을 버리고 무망한 각하론을 전개한 건 이해할 수 없다. 그는 탄기국(탄핵기각국민운동본부)의 구호를 “탄핵 기각”에서 “탄핵 각하”로 바꿔 운동의 초점을 분산시켰다는 것이다.

이렇듯 박근혜 전 대통령은 기각을 확신했던만큼 충격도 컸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탄핵심판 대리인단과 청와대 참모들이 박 전 대통령을 그렇게 몰아갔다는 것이다.

▲ 불 켜진 박 전 대통령 사저
한편 이날 머니투데이에 따르면 청와대 인사의 말을 인용, 이동흡 변호사 등 대리인단은 8일쯤 박 전 대통령에게 탄핵 기각이 확실시된다고 보고했다고 전했다. 탄핵심판 청구를 인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 헌법재판관은 4명 또는 5명에 불과하다는 구체적인 정보까지 곁들였다. 헌법재판관 출신인 이 변호사의 경륜과 정보력을 신뢰했던 박 전 대통령은 이런 보고를 철석같이 믿었다는 것..

대리인단은 기각을 예상하는 근거로 헌재가 박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 혐의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들었다. 헌재는 박 전 대통령의 뇌물 혐의에 초점을 맞춘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기록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앞서 수사한 검찰은 박 전 대통령에게 뇌물죄 대신 직권남용과 강요 등의 혐의만 적용했다.

뇌물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탄핵 인용을 위한 '중대한 법위반'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게 대리인단의 판단이었다. 헌재는 2004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선고 당시 대통령 파면을 뒷받침할 '중대한 법위반'의 구체적인 예로 뇌물수수, 부정부패 등을 들었다. 그러나 판례는 판례일 뿐이었다. 2017년 헌재는 뇌물수수가 없었더라도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씨를 위해 대의민주제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을 훼손하고 국민의 신임을 배반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중대한 법 위배행위라고 판단했다.

청와대 참모들도 박 전 대통령의 착각을 부추겼다. 홍보라인 등의 청와대 참모들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버즈량(언급횟수) 분석 결과, '탄핵 기각'이란 단어가 '탄핵 인용'보다 더 많이 인용됐음을 근거로 여론이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박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탄핵 찬성 의견이 약 80%로 탄핵 반대의 15%를 크게 앞서고 있다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도 신뢰할 수 없다는 의견을 박 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응답률이 20%에 못 미쳐 모집단(샘플)이 편향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였다.

'태극기집회' 참여인원이 '촛불집회'를 넘어선 것도 박 전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이 여론에 대한 '인지적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에 빠진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인지적 부조화란 사람이 자신의 신념이나 태도와 상충되는 현실적 상황에 처할 때 보이는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는 3.1절 태극기집회에 1000만명이 참석했다는 믿기 힘든 주장을 하기도 했다.

여권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이 본인의 결백을 확고하게 믿는 상황에서 탄핵이 인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하긴 쉽지 않았을 것"이라면서도 "박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 희망사항과 객관적 현실을 제대로 분리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박 전 대통령을 현혹시켰음은 부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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