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기자]"이질혼합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사람들끼리 만나면 편하다. 그래서 고교 동창들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들이 모이면 같은 얘기만 한다. 세상은 한 쪽으로만 굴러가지는 않는다. 대통령은 다른 목소리가 나오게 하고, 그 속에서 선택을 하면 된다, 그런 지혜를 가진 대통령이 필요한 지금이다.

5공 시절 전두환의 친인척과 측근들이 무척 싫어했던 사람이 있었다. 김종건 사정수석이었다. 그는 전북 익산 출신이었다.
권력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TK 핵심들 입장에선 김종건은 이질적인 존재였다.

물론 전두환과 김종건은 가까운 사이였다. 육사 선배인 전두환은 생도 시절 김종건을 아꼈고, 김종건이 육사를 그만두고 검사가 된 이후에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전두환은 비록 정당성 없는 독재자였지만, 조직을 이끄는 노하우는 있었다. 자신은 기업들로부터 천문학적인 돈을 받아 통치자금으로 썼지만, 다른 실세나 친인척들의 발호는 막고 싶어 했다.

실제 김종건은 독했다. 포철의 박태준 회장, 금융계의 황제 이원조가 그에게 불려가 호되게 당했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김종건 앞에서 자술서를 쓴 실세들도 있고, 눈물로 선처를 호소한 거물도 있다.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 장인인 이규동 씨도 김종건을 불편해했다.

김종건 전 사정수석이 생전에 이런 증언을 한 바 있다.

“전두환 정권이 권위주의 정권이어서 사정수석실이 야당이나 재야를 사찰한 것으로 오해를 받았지만, 원래 기능은 여권 내부의 기강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 어떤 기관도 다루기 힘든 대통령의 친인척, 핵심 실세와 검찰 안기부 등 권력기관을 감시하고 제어해 사회기강을 바로 세우는 역할을 했다. 적어도 나는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후임 사정수석들이 거꾸로 친인척과 잘 지내려고 하면서 비리가 커지게 됐다.”

그의 회고가 모두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5공 인사들을 통해 들은 얘기들로 비추어보면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 그들의 얘기로는 김종건이 사정수석으로 있는 동안에는 핵심실세들이나 친인척들이 상당히 조심했다고 한다.

물론 전두환의 천문학적인 비리는 사정수석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김종건의 역할은 제한적이었고 정권 전체의 부도덕함이 조금도 감소되지 않지만, 적어도 권력실세들 상호간 제어시스템은 작동하고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질적 존재를 곁에 두었다.

대선에서 이기자마자 경북 울진 태생의 민정당 출신인 김중권 씨를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내정했다. 평생 DJ를 모시며 민주화투쟁을 해온 동교동계 핵심들은 뒤집어졌다. 직접 찾아와 거칠게 항의한 실세도 있었다. DJ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당대의 실세인 권노갑을 일본으로 보냈다.

김중권은 동교동계나 집권 여당인 국민회의 입장에서 보면 눈엣가시였다. 오랜 세월 민주화운동을 해온 동지들을 공기업 감사나 여러 협회의 이사로 추천하면, 김중권 실장 벽에 막혔다. 여의도는 부글부글 끓었다.
공격이 시작됐다.

김중권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DJ를 겨냥하는 원망으로까지 비화했다. 그럼에도 DJ는 귀를 닫았다.
김대중 정부 2년 동안은 그런 상황이 지속됐다. 동교동계에게는 배신의 기간이었고 원망의 세월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2년 동안 친인척이나 실세 비리가 생기지 않았고, 국가적으로도 외환위기 극복, IT 벤처산업의 토대 마련, 한미동맹 강화, 남북관계 개선 노력 등 많은 성과들이 있었다.

그러나 물이 바위를 뚫듯이 동교동을 필두로 하는 여의도의 집요한 요구에 DJ도 김중권 카드를 접어야 했다.
마침 ‘옷 로비 의혹 사건’ 등이 터지면서 김중권 체제에 대한 피로가 심해졌을 때였다. 옷 로비 사건은 로비가 실패했으며, 실제 돈이 오간 증거는 없었지만, 실세 장관 부인들이 몰려다녔다는 ‘그림’만으로 과도하게 부풀려졌고, 어쨌든 그 여파는 권력 핵심부의 진용 개편으로 이어졌다.

이후 들어선 체제는 청와대 비서실장 한광옥, 정무수석 남궁진, 민정수석 신광옥, 당 고문 권노갑 등이었다. 호남 인맥과 동교동 인맥이 사실상 권력 핵심부를 장악한 것이었다.

한광옥 실장이나 남궁진 수석 등이 신실한 사람들이었지만, ‘형님, 동생’으로 얽혀진 수 십 년의 인연은 과거 동지들의 웬만한 잘못을 눈감아주는 결과로 이어졌고, 급기야 DJ 아들들까지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이 두 사례를 언급하는 것은 다음 대통령도 권력 핵심부에 ‘형님, 동생’이 아닌 이질적 존재를 두었으면 해서다.

이질적 존재라고 해서 독설이나 일삼고, 뚝하면 삐지고, 자기 정치를 하려는 사람을 두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인물은 동지여도 빼야 한다. 기본적으로 공적 의식이 강하고, 애국심이 있으며, 진지함과 열정을 갖고 있어야 한다. DJ 입장에선 김중권은 판사를 거친 신중한 인물이었고, 청와대 정무수석,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국정운영의 원리를 아는 전문가였던 것이다.

정책적 측면에서도 공적 감각을 갖춘 이질적 존재는 필요하다.

재벌개혁을 추진할 때 그 후유증을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어야 하며, 사드 배치를 놓고 토론할 때도 국가적 자존심이나 남북관계 우선 속에서도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꿰뚫고 있는 외교전문가도 필요하다.

한마디로 대통령의 능력중 하나로 '이질혼합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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