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 캡쳐
[김홍배 기자]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전두환 씨가 무력 진압에 직접 관여했다는 군 내부 문서가 나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 3일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에서 "광주사태 당시 국군에 의한 학살이나 발포명령은 없었다"는 주장을 정면 반박한 것이다.

4일 한겨레에 따르면 확보한 육군 제2군사령부(영호남·충청지역 관할)의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을 보면, 5·18 민주화운동 당시 군 자위권 발동을 결정한 국방부 회의와 관련해 손 글씨(수기)로 “장관, 총장, 군사령관, 합수본부장, 수경사령관, 특전사령관, 육사교장(차)”이라고 돼 있다.

이 문건은 80년 5월 2군사령부가 작성한 문건을 기무사가 보관하다 국방부 과거사위원회에 제출됐다. 이 문건엔 ‘전(全) 각하(閣下): 난동 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명시돼 있다.

이 문건에 손 글씨로 써진 당시 상황상 ‘전 각하’는 전두환씨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2군사령부의 문건에 나온 국방부 회의 참석자는 <제5공화국 전(前)사>에 나온 참석자 명단과 일치한다. <제5공화국 전사>는 1979년 12월12일부터 5공화국 출범까지 신군부 쪽이 자신들의 업적 등을 서술해 출간한 9권짜리 비공개 기록물이다.

<5공전사>를 보면, 자위권 보유 천명을 결정한 5월21일 국방부 회의엔 “(주영복) 장관을 비롯해 합참의장 유병현 장군,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 수경사령관 노태우 장군, 육사교장 차규헌 장군, 특전사령관 정호용 장군 등이 참석했다.(▶관련기사 : <한겨레> 전두환, ‘광주 발포’ 결정 회의 참석) 12·12 및 5·18 재판 법원 기록을 보면, 이 국방부 회의는 80년 5월21일 오후 4시35분에 열렸다.

이 날은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들에게 집단발포가 자행된 날이다. 국방부 과거사위원회(2007년)는 “이 수기(손글씨)에 언급된 명단이 <5공 전사>의 명단과 동일한 것으로 봐서 아마도 1981~82년 <5공 전사> 작성 과정에서 자료 취급자가 손으로 기록해 놓은 것으로 판단될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

▲ 3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대형서점에 '전두환 회고록'이 비치돼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우리도 5.18 피해자', '5.18은 폭동' 등을 주장하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매체는 하지만 <5공 전사>엔 ‘자위권 발동 관련 언급자’를 손 글씨에 언급된 ‘전 각하’가 아니라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 바뀌어 기록됐다. 쿠데타에 가담한 신군부 핵심 300여명을 인터뷰해 <5공 전사>를 쓴 사람들은 이를 확인하려는 국방부 과거사위의 면담 요청을 거부했다. ‘전 각하’가 전두환씨로 확인되면 5·18 무력 진압의 직접 당사자라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5·18 발포 명령을 둘러싼 의혹을 앞으로 재조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씨는 회고록 서문에서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발포 명령’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전씨의 내란죄 등을 다룬 1996년 1심 재판부는 전씨에 대해 “계엄군으로 하여금 광주 외곽을 봉쇄하고 자위권 발동이라는 명목으로 발포하게 하여 사상자가 발생하더라도 조속히 진압하기로 공모한 혐의”를 인정했지만, 항소심에서 ‘자위권 부분’은 빠졌다.

5·18 연구자들은 “새 정부가 들어서면 5·18 발포 명령자를 밝히기 위해 진상규명 차원의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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