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월성 A지구 성벽 내 인골 출토
[김승혜 기자]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 2구가 경주 월성에서 출토됐다. 이란계 토우, 간지가 적힌 목간도 함께 나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15년 3월부터 발굴하고 있는 경상북도 경주시 교촌안길 38 일대 경주 월성(사적 제16호) 중간조사 결과다.

5세기 전후 월성 서쪽의 성벽 축조 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제의의 흔적이 국내 최초로 확인됐다. 성벽을 본격적으로 쌓기 직전인 기초층에 2구가 있었다. 한 구는 정면으로 똑바로 누웠고, 다른 한 구는 반대편 인골을 바라보게끔 얼굴과 한쪽 팔이 약간 돌려졌다. 두 구 모두 얼굴 주변에서 나무껍질이 부분적으로 확인됐다.

주거지나 성벽 건축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쓰는 습속은 고대 중국(BC 1600~1000께 상나라)에서 성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방이나 건물의 축조와 관련된 인주(人柱) 설화로만 전해져 오다가 이번에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셈이다. 사람을 기둥으로 세우거나 주춧돌 아래에 묻으면 제방이나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 인주설화다. ‘고려사’ 충혜왕 4년(1343)에 ‘왕이 민가의 아이를 잡아다가 새로 짓는 궁궐의 주춧돌 아래에 묻는다’라는 유언비어가 돌았다고 전한다.

이들 인골의 성별·연령 등을 확인하기 위한 체질인류학적 분석과 DNA 분석, 콜라겐 분석을 통한 식생활 복원, 기생충 유무 확인을 위한 골반 주변 토양 분석이 이뤄지고 있다. 뼈는 당시 사람들의 체질적 특성이나 인구 구조, 질병과 건강 상태, 식생활, 유전적 특성 등을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한편 월성 북쪽 면에 길게 늘어서 있는 해자(垓字), 즉 적의 침입을 막으려고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에서는 2015년 12월부터 내부 정밀보완조사를 해왔다. 약 500년 동안 수혈해자에서 석축해자로 변화하며 지속해서 사용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수혈해자는 월성 성벽을 둘러싼 최초의 해자다. 성벽 북쪽에 바닥층을 U자 모양으로 파서 만들었다. 해자 가장자리가 유실되거나 이물질을 막고자 판자벽을 세웠다. 판자벽은 약 1.5m간격 나무기둥을 박고 두께 약 5㎝의 판자를 세우는 방식으로 조성했다.

석축해자는 수혈해자 상층에 석재를 쌓아올려 조성했다. 독립된 각각의 해자는 입·출수구로 연결돼 있다. 시간이 가면서 다시 쌓거나 보강하면서 폭이 좁아졌다. 내부 토층별 출토 유물 분류 결과 수혈해자는 5~7세기, 석축해자는 8세기 이후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월성 성벽과 해자는 성벽을 먼저 쌓은 다음 최초의 수혈해자를 파 조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성벽과 해자를 다시 쌓거나 보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벽 경사면에 해자의 석축호안을 쌓는 등 유기적으로 축조했다.

▲ 경주 월성 터번 쓴 토우
해자에서는 토우(土偶)들이 여럿 출토됐다. 모양은 사람과 동물, 말 탄 사람 등 다양하다. 터번을 쓴 토우도 있다. 눈이 깊고, 끝자락이 오른쪽 팔뚝까지 내려오는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있다. 소매가 좁은 카프탄, 즉 터키, 아라비아 등 이슬람문화권에서 폭넓게 착용되는 셔츠양식의 긴 의상을 입고 있으며 허리가 꼭 맞아 신체 윤곽선이 드러나고 무릎을 살짝 덮은 모양이다. 당나라 시대에 ‘호복(胡服)’이라고 불리던 소그드인 옷과 모양이 유사하다. 페르시아 복식의 영향을 받은 소그드인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근거다. 현재까지 출토된 소그드인 추정 토우 중 가장 이른 6세기 것으로 판단된다. 소그드인(Sogd人, 粟特)은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를 근거지로 하는 현 이란계 주민이다.

월성 해자에서는 목간도 7점이 나왔다. 목간 제작 연대와 해자를 사용한 시기, 신라 중앙정부가 지방 유력자를 통해 노동력을 동원·감독한 사실, 가장 이른 시기의 이두(吏讀) 사용 사실을 확인했다.

‘병오년(丙午年)’이라고 적힌 목간은 월성해자 출토 목간 가운데 정확한 연대가 최초로 확인된 것이다. 병오년은 6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기 때문에 법흥왕13년(526)이나 진평왕8년(586)으로 볼 수 있다. 월성의 사용 시기를 확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6세기 신라의 활발한 문자활동도 증명해준다.

지방민에게 주어지던 관직을 의미하는 ‘일벌(一伐)’, ‘간지(干支)’라고 적힌 목간은 노동을 의미하는 ‘공(功)’과 연결돼 왕경 정비 사업에 지방민이 동원됐고 그들을 지방 유력자가 감독했음을 보여준다. 6세기 동안 이뤄진 진흥왕12년(551)의 명활산성 축성, 진평왕13년(591)의 남산신성 축성 등 큰 공사에 신라 중앙정부가 지방에 행사한 통제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 다른 목간에 적힌 글자인 ‘백견(白遣)’은 이두의‘ᄉᆞᆲ고’, 즉 ‘사뢰고(아뢰고)’라는 뜻이다. 신라 왕경 내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이두로 판단된다.

또 ‘삼국사기’에서 확인되지 않은 새로운 관직명인 ‘전중대등(典中大等)’, 유학(儒學)이 퍼져 중국 주나라 주공을 모방해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이는 ‘주공지(周公智)’, 당시의 동물과 식생활을 추정할 수 있는 ‘닭(鷄)’과 ‘꿩(雉)’ 그리고 ‘안두(安豆)’등의 글자가 적힌 목간도 확인됐다. ‘주공’은 주나라 무왕의 동생 이름, 지는 이름 뒤에 붙는 어미다. 안두는 녹두 또는 완두로 추정된다.

동물뼈, 식물유체, 목제유물 등 다양한 자료들도 해자에서 출토됐다. 동물뼈는 돼지, 소, 말, 개가 가장 많았다. 곰 뼈도 나왔다. 신라 시대 유적에서 곰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입과정과 사용례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 멧돼지나 개의 머리뼈를 절단·타격한 흔적, 작은 칼과 같은 도구로 다듬은 흔적에서 도살과 해체 작업을 엿볼 수 있다. 소의 어깨뼈에 새긴 동그란 흔적을 통해 뼈 자체를 사용하고자 한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식물유체는 식물의 줄기와 잎, 열매, 씨앗 등으로 분류된다. 씨앗류가 가장 많이 출토됐다. 가시연꽃(산림청 지정 희귀식물) 씨앗이 제일 많다.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식물이다. 당대 해자 물의 흐름, 깊이, 수질 등을 추정할 수 있다. 곡류, 채소류, 과실류의 씨앗이 양호한 보존 상태로 확인되고 있어 식생활도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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