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기자]5월 23일, 전현직 대통령 3인에게는 운명의 날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8년 전, 2009년 5월23일 고향 김해 봉하마을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한다. 자서전 운명에서다.

“경황이 없었던 그날, 그러면서 눈물을 참으며 담담하게 국민들에게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발표해야 했던 노무현의 영원한 친구 문재인이었다.”고...

23일, 지난 3월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도 운명의 날이다.

지난해 12월 국회의 탄핵 소추안 가결에 이어 올 3월10일 헌법재판소의 파면 선고 그리고 3월말 구속. 첫 재판이 열리는 날이 공교롭게도 노 전 대통령 서거 날이다.

대통령 3인의 운명은 이렇게 엇갈렸다. 역사의 반전도 이런 반전이 있을까.

5년 전과 현재의 모습이 달라도 너무 달라진 문재인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야기다. 2012년 12월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으로 광화문에서 국민대통합을 역설할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패배자로 고개를 숙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4년 6개월여가 지난 오늘. 박 전 대통령은 구치소에서 구입한 머리핀으로 올림머리를 한 뒤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았고, 문 대통령은 정치 멘토이자 평생 동지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찾아 제19대 대통령으로서 당선 신고를 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대통령묘역에서 엄수되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 8주기 추도식에 참석했다. 노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 한 번도 빠짐없이 매년 참석한 문 대통령이지만 올해는 의미가 남달랐다.

대통령 신분으로 추도식에 참석하는 것은 당연히 이번이 처음이었다. 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추도사를 직접 낭송했다. 그 안에는 대통령 당선 인사 의미도 포함돼 있다. 5년 전 이루지 못했던 대통령의 꿈을 마침내 이뤘다는 보고를 전직 상관에게 올리는 셈이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대통령 신분으로 마지막 참석을 알리는 특별한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인사말 형태를 빌린 추도사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 당신이 그립고 보고 싶다. 하지만 저는 앞으로 임기동안 노 전 대통령을 가슴에만 간직하겠다"며 "현직 대통령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성공한 대통령이 돼 다시 찾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이날 추도식은 대선 패배의 결과를 안고 찾았던 2013년 당시 추도식과는 여러모로 대조됐다. 4년 전 추도식 당시 초선 의원 신분으로 찾았던 문 대통령의 얼굴엔 비장함과 결연함이 서려있었다. 친구가 못 다 이룬 꿈을 대통령이 돼 대신 이루고 싶었지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없음에 미안함도 묻어났다.

당시 문 대통령은 "우리들의 꿈이자 목표는 지난해 대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결코 내려놓을 수 없으며, 5년 이후에는 반드시 이뤄야 하는 것"이라며 "지난번 출마해서 국민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바 있으니 다음 대선 때 정권교체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결국 문 대통령은 5년 만에 노 전 대통령 묘역 앞에서 다짐했던 약속을 지키게 됐다는 감격의 메시지를 전했다. 5년 전 대선 패배로 고개를 숙여야 했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 됐다. 문 대통령은 이날 "제가 대선 때 했던 약속, 오늘 이 추도식에 대통령으로 참석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며 남다른 소회를 전했다.

반면 5년 전 승자의 기쁨을 만끽했던 박 전 대통령은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웃음기 사라진 자연인 신분으로 내려오게 됐다. 박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부터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417호 대법정에서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등 혐의의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을 받았다.

5년 전 대선을 끝내고는 '모든 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외쳤고, 2013년 5월 노 전 대통령 추도식이 열린 그날에는 청와대에서 '창조 경제'를 주문하고 있었던 박 전 대통령이다.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던 박 전 대통령이지만 이날은 왼쪽 가슴에 단 수감번호 503번을 단피고인으로 국민들의 머릿속엔 각인됐다.

정점에서 바닥으로 내려온 시간이 짧았던 만큼이나 박 전 대통령의 얼굴엔 세월의 무상함이 어려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다소 어두운 기색이었지만 '트레이드마크'인 올림머리를 고수하며 마지막 자존심은 지켰다.

국민적 지탄을 받고 있는 40년 지기 최순실씨와 함께 법정에 섰지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재판 내내 담담한 표정으로 정면만을 응시하던 박 전 대통령은 차분하게 재판에 임했다. 인정신문에서는 직업을 묻는 판사에게 "무직입니다"라고 덤덤하게 답했다. 혐의를 전부 부인하냐는 물음에는 짧게 "변호인 입장과 같다"라고만 했다.

문 대통령은 평생 동지에게 당선 신고를 하는 날에 박 전 대통령은 평생 친구와 함께 수용자 번호를 달고 함께 법정에서 재판관의 지시에 따랐다. 두 전현직 대통령의 상반된 모습에서 너무나 많은 생각이 드는 하루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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