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7월25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2008 FICC 가평 세계캠핑대회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세계 캠핑캐라바닝의 흐름과 한국 캠핑캐라바닝문화의 발전방향'이란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 개회식에서 FICC 세계 캠핑캐라바닝 페레이라 총재와(왼쪽), 장경우 조직위원장이 홍보영상물을 보고 있다.
사춘기 때면 누구나가 사로잡히는 하나의 화두가 있다. 바로 ‘멋지게 살자’이다 어른들이‘좋다’고 하는 것은 기를 쓰고 ‘아니다’며 고개를 젓고 어른들이 ‘가라’는 길로는 또 죽을 용을 쓰며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는 이른바 ‘개똥철학‘으로 ’중무장‘을 하고는 세상이 온통 자기를 내치는 것만 같은 근거없는 고립감에 시달리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당시 내가 가장 거부하고 싶었던 것은 어른들이 하나같이 ‘좋다’고 말하는 ‘경기중고등학교’라는 것이었다.

소위‘일류’가, 그리고 그 중압감이 그렇게도 싫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때 ‘어른들이 좋다고 말하는 일류‘라는 건 ’멋지게 사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건달(乾達)의 정의

얼마 전에 장안에 화제가 됐던 영화로 요즘 한참 인기 절정인 배우 ‘한석규’가 주연을 한 <넘버 3>라는 영화가 있다. 높은 실험정신을 보여주면서도 재미를 잃지 않아 한국영화로는 오랜만에 호평을 받았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물론 한국여화로는 흥행에도 꽤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얼마 전에 군대에 간 막내아들과 함께 보았다. 일요일 하루 집에 있는데 군대에 가기 전 잠시 쉬고 있었던 막내가 거실에서 이 영화를 비디오로 보면서 어찌나 웃어대는지 슬그머니 곁눈질을 좀 하다가는 나도 그만 빠져들어 ‘야, 처음부터 다시 보자’하고 만 것이다.

아무튼 거기에 이름도 거창한 ‘불사파’라는 ‘귀여운’깡패 조직이 나온다. 그 두목으로 나온 배우는 연기를 기가 막히게 잘해서 오히려 주연보다 더 주목을 받았고 요즘에는 광고에까지 나오고 있다. 단 세 명의 조직원을 데리고 오직 단 하나 ‘폼 나는 깡패조직’을 꿈꾸며 지옥 훈련을 한다, 어쩐다 하면서 ‘헝그리정신’을 외쳐대는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배꼽을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귀여운’ 깡패들이 ‘건달’에 대해서 내리는 정의가 정말 걸작이다. 건달이라 함은 하늘 건(乾)에 이를 달(達)자를 쓰는데 그 뜻대로 건달은 하늘에 이른 사람,즉 통달한 사람이라는 것이다.나는 파안대소를 터뜨리다가 갑자기 그게 정말인가 싶어져 국어사전까지 뒤져 보았다.

정말 건달의 한자는 하늘 건에 이를 달이다. 물론 뜻풀이는 '돈도 없이 난봉을 부리고 돌아다니는 사람'으로 되어 있지만 말이다.아무튼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실로 오랜만에 실컷 웃어보았고 그 여흥이 며칠을 갔다. 그것은 그 '귀여운'영화위로 역시 그에 못지 않게 귀업기만 했던 나의 웃지못할 추억이 겹쳐져 왔기 때문이다.

 ‘세븐’과 ‘일삼’의 대결

내 또래의 남자라면 '클럽'이나 '써클'이라는 말에 사전적 의미 외에 다른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구락부(俱樂部)'나 '동아리'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말에는 우리 학창 시절의 방황,그리고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적 배경이 이리저리 얽혀 있기 때문이다.

사춘기 때의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외부로부터 자신이 뭔가 배척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뜻이 맞는 친구들'끼리 모이는 걸 통해 많은 위안을 받는다. 그래서 턱없이 비장하기까지 한'우정'을 논하기도 하고 친구를 위해서는 몸을 아끼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기도 한다.

요즘 아이들은 그런 걸 어떻게 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 정서에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아무튼 그런저런 배경과 당시 아이들의 조숙함이 어우러져 그때는 각 학교마다 유명한 클럽이 있었다. 그 클럽을 통해 동류의식을 느끼고 다시 그걸 통해 막연한 우월감이나 선민의식 같은 것도 가지게 됨은 물론이다.

우리 경기고의 클럽으로는'세븐'과'일삼'이 유명했다.둘 다 역사가 깊은데다가 워낙에 유명해서 거기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클럽은 클럽대로 자기들의 선민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당시 세븐클럽에는 현재 국민회의의 김원길 위원이 있었다. 김원길 씨는 클럽 안에서 유일한 공부파로 통했다.그리고 일삼클럽에는 역시 국민회의의 박정훈 의원,또 한격만 검찰총장의 아들이었던 한수걸 씨등이 유명했다.

그런데 이 두 클럽 사이에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분란이 일어났다.학교 내에서 서로 일종의 주도권 다툼을 하는 것이었다. 정학을 맞는 학생들도 많았고 간혹 아예 퇴학을 당해 다른 학교로 편입 해 들어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비록 고등학교 조직이었지만, 그 때의 고등학생들 자체가 요즘 학생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른스러웠고 성숙했기 때문에 그만큼 클럽의 활동 또한 요즘에는 상상도 못할 면모를 보였다.

그렇다고 그 때의 고교생 클럽들이 사회의 무슨 깡패조직과 같은 것은 더 더욱 아니었다. 나름대로는 밤을 새워가며 철학과 삶을 논하기도 했으며 앞 뒤 없이 설쳐대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그 때의 클럽들에는 그 시절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진지함’과 그런 저런 분위기의 ‘독특함’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에도 여전히 체육관을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학교에서는 퍽 조용한 아이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런 클럽들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정작은 더 큰 일을 저질렀다. 일삼도 아니요 세븐도 아닌 ‘아이스크림’이라는 클럽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제3의조직 ‘아이스크림’

지금 생각하면 철부지 사춘기 아이들의 모임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그 때는 꽤나 거창했다. 처음 체육관을 중심으로 모이던 열 명의 친구가 모여 만든 ‘아이스크림’은 후일 경복고,용산고,성동고,성남고,배제고,등 6개 고교를 포괄하는 클럽으로 확대된 것이다.

우리가 굳이 ‘아이스크림’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것은 다른 클럽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자는 뜻에서였다. 당시 고교생들의 클럽이름은 무슨암호같거나 한자이름이 대부분이었는데 우리는 부르기도 쉽고 부담도 없는 ‘아이스크림’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이다. 이른바 창립멤버 중에는 미술을 아주 잘하던 ‘이광준’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뛰어난 손재주로 아이스크림을 본 딴 뺏지를 은으로 만들어 우리는 그것이 무순 훈장이라도 되는 듯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들이 모두다 학교에서는 아주 얌전했다는 것이다.그런데 웬걸 학교 밖에만 나갔다하면 전혀 달랐다. 아예 학교갈 때 사복을 챙겨 가지고 나가 수업이 끝나면 빵집으로 직행 새 사복으로 갈아 입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솔직해 그 때는 겅ᄋ기고 교복이 주는 중압감이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온갖 폼을 다 잡고는 시내로 나가봤자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광교 일대,그러니까 보신각 옆에 있던 풍년제과나 뉴욕제과에 죽치고 앉아 무직박스에 돈을 넣고 도너스판을 갈아 끼워가며 제 흥에 겨워 몸을 흔들거리거나 금방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한숨을 푹푹 내쉬며 밑도 끝도 없이 인생을 논하거나...그도 아니면 중국집에 들어가서 실컷 먹고 나서는 미리부터 치밀하게 짜놓은 전략과 전술'에 따라 순서대로 ‘튀는 것 ‘이 전부였다.

그 때는 그것이 왜 그리도 재미있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우리는 그것이 무슨 대단한 모험이라도 되는 양 가끔씩 날을 잡아 ‘일’을 내고 다녔던 것이다. 그ᄅ러고 다녔으니 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안날 리가 없다. 나중에는 ‘일삼’과 ‘세븐’에서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서로 협상을 건네 오기도 했으니...나도 알고 보면 한 때는 주름깨나 잡고 다녔던 축에 들었다며 너스레를 떨어볼 수밖에.

당시 아이스크림 안에서 나는 이상하게 ‘해결사’나 ‘소방수’역할을 도맡아 해야만 했다. 친구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이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하면 꼭 나를 불러가 중재자로 세우는 것이었다. 동네방네 쫒아 다니며 뒤치닥거리란 뒤치닥거리는 다 내 몫이었다. 부모님에게 혼나는 일이 있어도 그 앞에 가서 해명을 해야 하는 건 언제나 나였다. 그 중재자 노릇이 이 후 정치권에서도 어쩔 수 없는 내 운명이 되리라는 건 물론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와중에서도 우리는 학교 내에서 만큼은 신기할 정도로 점잖았다. 부모님은 아예 상상도 못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속으로는 더없는 ‘악동’들이라는 걸 눈치 챈 선생님도 없었다. 대단한 내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급기야 사건이 터지고 말았으니 바로 ‘의정부 사건’이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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