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혜 기자]김기춘(78)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블랙리스트' 명단을 본 적이 없고 전혀 알지 못했다"며 문화예술인 지원 배제 지시를 전면 부인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부장 황병헌) 심리로 28일 열린 피고인 신문기일에서 김 전 실장은 '청와대에서 근무할 때 문화예술계 인사관리 명단이 작성된 게 사실이냐'는 질문에 "그런 사실 자체를 재임 중에 알지 못했다"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어 "블랙리스트는 작년에 언론 보도로 처음 들었고 청와대에 배제자 명단이라는 이름도 없었다"며 "보조금과 관련해 각 부처에서 나름대로 기준을 취합한다는 정도는 들었지만 문체부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김 전 실장은 블랙리스트에 국가정보원이 관여한 정황을 보여주는 '시도 문화재단의 좌편향·일탈행태 시정 필요'라는 제목의 문건과 관련해서도 "재임 중에는 본 기억이 전혀 없고 여기(법정)에 와서 봤다"고 말했다.

그는 '저런 제목의 문건이 자주 있었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나이 든 게 자랑은 아니지만 3~4일 전 모임에서 있었던 일도 잘 기억이 안 난다"며 "3~4년 전의 보고서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밝혔다.특검이 "국정원에서 이런 류의 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본인 지시에 따른 것이냐"고 묻자, 그는 "아니다. 국정원 자체에서 알아서 한 것이지 제가 시키거나 지시한 건 없었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김 전 실장은 "문건을 보낸다고 이대로 하라는 실행지시가 아니다"며 "각 부처 최종 책임은 장관에게 있다. 문체부 장관이 판단할 문제"라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을 그린 화가를 지목하는 대목에서 '이념편향'을 뜻하는 것인지 묻자, 김 전 실장은 "제가 평가할 수 없다"며 "대통령을 모독하는 그림을 그렸다고 해서 좌익, 좌편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지원 배제와 관련해 청와대에서 구성된 '민간단체보조금 TF' 운영도 모른다고 밝혔다. 김 전 실장은 "국고보조금 낭비 및 누수 실태 파악을 한 적은 있었던 걸로 기억하지만 제가 근무할 당시 문화예술계 좌파 지원 전수조사를 해보라고 말한 적 없다"며 "저뿐만 아니라 대통령에게도 보고가 안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태강 당시 문체부 체육국장(현 2차관) 등 문체부 1급 공무원들의 사표를 받으라고 지시한 적도 없다고 진술했다.

김 전 실장은 "실국장 인사는 인사위원회 심의 대상이 아니다"며 "사직서를 낸 분들과 개인적인 안면도 없고 이들이 일을 잘 못한다고 불만을 가진 일도 없다. 사직을 강요할 동기가 없다"고 반박했다.

특검이 "청와대가 문체부 직원들을 왜 이렇게 괴롭혔냐"고 묻자, 김 전 실장은 "전 괴롭힌 일이 없다. 참모들이 괴롭혔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한편 특검 측은 개인정보보호법 등 관련 공소장 변경 허가를 지난 26일 신청했고, 김 전 실장 변호인은 불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양측 의견을 구체적으로 듣고 추후 허가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이날 법정에서 방청하던 한 40대 여성은 "거짓말 하지 말라"며 소리를 질러 퇴장 조치됐다. 블랙리스트 명단에 이름이 오른 이 여성은 법정 밖에서 기자들과 만나 "김 전 실장은 지시한 바 없고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고 있는데 예술가들에게는 생명과 같은 일이었다"며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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