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 캡쳐
[김승혜 기자]"암호명 A는 한국인, 나이는 50, 그의 부인과 두 자녀는 콜로라도주에 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육군전략처(OSS)는 한반도에 침투해 일본을 무력화시키려는 목표로 '냅코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여기에 선발된 정예요원의 신상이 눈길을 끈다. 나이 쉰에 가족을 남겨두고 특수 공작원이 된 암호명 A는 유한양행의 창업주 고 유일한 박사였다. 살아서 돌아올 것을 장담할 수 없었던 작전에 참여하면서 그의 어린 아들딸은 다른 가정에 맡겼다.

왜 성공한 사업가이자 가장인 그가 독립에 몸을 던진 것인가

유일한은 1905년 10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향했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를 서서히 장악해가기 시작하자, 그의 아버지였던 유기연이 나라를 구할 인재가 되어 돌아오라는 당부와 함께 어린 아들을 떠나보냈다.

유일한은 14세 때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고 24세에는 필라델피아 한인대표자회의에서 서재필, 이승만과 함께 결의문을 작성했다. 또 재미한인들이 참여한 군사조직 ‘맹호군’ 창설을 주도하고 OSS의 특수요원이 됐다. 그는 오랜 기간 준비된, 몸을 사라지 않는 독립운동가였다. 이후 나라가 주권을 되찾고도 그는 민족의 진정한 독립을 꿈꿨다. 그는 1964년 개인 주식을 팔아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 어려운 형편 때문에 배움을 포기했던 아이들이 계속 꿈을 꿀 수 있도록 도왔다.

주권 회복 후에도 가난과 자본, 무지와 질병, 권력과 부패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국가를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유일한.

15일 광복절 특집 다큐, '유일한, 독립을 말하다'가 오전 11시 KBS1 TV에서 방송됐다. 제작진은 광복 72주년을 맞은 2017년, ‘독립’의 의미를 유일한의 삶을 통해 되살려보자는 취지로 방송을 제작했다고 전했다.

유일한, 전재산 사회에 기부

한편 이날 인터넷에는 검색순위 1위에 오를만큼 독립운동가이자 사업가인 유일한 박사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유일한 박사는 미시간주립대학교 등을 졸업한 뒤 1926년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유한양행(柳韓洋行)은 유 박사의 이름을 딴 유한(柳韓)과 세계로 통한다는 뜻의 양행(洋行)을 합친 말로, 유한양행의 상징인 '버들표'는 유 박사의 성에서 착안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유한양행은 세워진 첫 해 염색약, 위생용품, 결핵약, 진통소염제(안티플라민) 등을 미국에서 수입해 팔았고 이듬해부터 화장품, 농기구, 염료 등도 팔았다. 1936년 유한양행은 주식회사로 전환했고 초대 사장에 유일한 박사가 취임했다. 

1941년에는 수출을 전담하는 유한무역회사를 세웠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조업이 중단된 이후 1953년 본사 사옥을 다시 짓고 사업을 재개했다. 1957년 미국 제약회사인 사이나미드와 기술 제휴 협약을 맺었으며 이 해에 유한양행은 국내 최초의 항생물질 제품을 만들었다. 

1971년 창업자 유일한 박사가 타계했다. 유 박사는 손녀(당시 7세)에게 학자금으로 1만 달러를, 딸에게 묘소 주변의 땅 5000평을 물려주는 것을 제외하고 전 재산을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부해 화제가 됐다. 이 재단은 1977년 유한재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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