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일보 사진 캡쳐
[김홍배 기자]1980년 5.18 당시 과연 누가 광주시민을 향해 총을 쏘도록 명령헀나

5‧18 당시 군 당국이 광주 시민을 향해 총을 쏘도록 발포 명령을 하달했다는 군 내부 기록이 처음 공개되면서 최세창 여단장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최세창’이 실시간 검색어에 랭크되며 네티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는 최 여단장이 공개된 문건에 실탄을 지급한 부대의 책임자이자 전두환의 최측근이기 때문이다. 네티즌들은 최세창이 최초 발포 명령자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고 있다.

24일 한겨레는 ‘광주 소요사태’라는 기밀문서에 나오는 ‘발포 명령 하달(1인당 20발)’이라는 문서를 근거로 자위권 천명 전 발포라는 제목의 글에서 최세창을 거명했다.

그 근거는 지금까지 자위권 발동 차원이었지 '발포명령'은 없었다는 37년간의 주장을 뒤엎는 자료로 이 문서가 작성된 시점은 ‘80년 5월21일 새벽 0시20분’으로 나온다. ‘실탄 장전 및 유사시 발포 명령 하달’ 시기는 ‘(5월20일) 23시15분’으로 당시 보안대는 파악하고 있다. 5월20일 밤 11시 전남대 인근 광주역 앞에선 제3공수여단(여단장 최세창) 소속 군인의 발포로 시민 4명이 사망했다. 광주에서 군의 첫 발포 직후 보안대 보고에 ‘발포 명령 하달’이란 내용이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5월21일 오후 1~5시 광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단발포로 시민 34명이 숨졌다. 계엄사령부가 자위권 발동 천명 방침을 밝힌 뒤 자위권 발동을 허락한 것은 이런 일이 있은 뒤인 5월21일 저녁 8시30분이라는 지적이다.

당시 전남대 부근에 주둔했던 병력은 제3공수여단으로 최세창 여단장이 부대 책임자다. 최 여단장(육사 13기)은 신군부 실세 전두환 보안사령관(육사 11기)이 제1공수여단장이었을 때 부단장을 지낸 측근으로 유명하다.

1980년 8월20일 밤 11시 전남대 인근 광주역 앞에선 최 여단장이 이끈 부대의 소속 군인이 발포해 시민 4명이 숨졌다. 다음날인 21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옛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선 공수부대원들의 집단발포로 시민 34명이 사망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기록 보고서에는 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5월20일 밤 10시30분 ‘경계용 실탄’을 위협 사격용으로 공수부대 각 대대에 지급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88년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이 펴낸 ‘광주사태체험수기’에도 이상휴 중령(당시 3공수여단 13대대 9지역대장)이 “전남대학교에서 급식 후 중대장 지역대장에게 M16 실탄 30발씩 주고, 사용은 여단장 통제”라고 명시돼 있다.

이 때문에 인터넷 포털사이트엔 ‘최세창’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SNS와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최세창 여단장에 대한 과거가 재조명 되고 있다. 많은 네티즌은 최 여단장을 추궁하면 최초 발포 명령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쏟아내고 있다.

올해 84세인 최 여단장은 1977년 육군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장에 임명됐으며 1979년 10월 부마항쟁 때도 진압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인물이다. 육군 제1군단장, 육군참모차장, 육군 제3야전군사령과, 합동참모의장,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등을 역임했다.

1997년 4월17일 대법원에서 열린 12‧12 군사 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재판에서 반란 모의 참여 주요 임무 종사‧상관 살해 미수 등의 혐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지만 1998년 8월15일 사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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