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국민의당 대표실에서 열린 시도당위원장협의회 간담회에 참석한 안철수 대표가 미소짓고 있다.
[김민호 기자] ‘새정치’라는 국민적 열망에 힘입어 안풍(安風)을 일으킨지 벌써 5년,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오는 19일로 정치인으로 변신한 지 5년째를 맞는다. 안 대표 본인은 18대 대선 출마를 선언했던 2012년 9월 19일을 정치입문 시점으로 삼고 있다.

최근 "정치를 시작한 지 벌써 20년은 되는 느낌"이라는 소회를 밝힐 정도로 안 대표는 지난 5년간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곡절 많고 시련이 많은 파란만장한 나날을 보내왔다.

그는 지난 15일 대구 방문 일정 중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짧은 시간 내에 압축적으로, 농축적으로 정치 경험을 했다"면서 "이제 새롭게 경험할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스스로 '20년 같은 5년'을 지내온 것에 동의했다.

'새정치'를 목에 걸고 '철수 정치'를 했고 스스로 '강철수'가 되겠다고 당대표를 거머 쥐었지만 지금의 국민들 시선은 따갑다. 한 네티즌은 '간철수'라고 비판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국민의당 지지율 5%가 그 근거"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안 대표의 출현으로 한국 정치의 변화도 적지 않았다.

안철수는 '5·9 대선' 패배와 '제보조작' 사건 파문 등으로 궁지에 몰렸다가 '8·27 전당대회'를 통해 국민의당의 당 대표로 선출되며 비교적 짧은 기간에 다시 정치권의 전면에 등장했다. 하지만 그간 빛이 바랜 '새정치'의 이미지를 회복하고 다시 국민의 지지를 얻을지가 과제로 꼽힌다.

정치인은 안 대표가 도전한 네 번째 직업이다. 의사에서 '벤처신화'의 주인공으로, 그리고 유학길을 거쳐 교육자로 변신했다가 뒤늦게 정치에 투신했다.

의학실험 중 바이러스에 감염된 컴퓨터를 치료하기 위해 직접 만든 백신 프로그램으로 1995년 안철수연구소(안랩)을 창업하고 '벤처신화'를 일군 그가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9년 MBC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면서부터다. 2011년에는 전국 25개 도시를 순회하는 '청춘콘서트'를 진행하며 젊은이들의 멘토로 떠올랐다.

특히 같은 해 9월 서울시장 재보선 당시 유력 후보로 급부상했던 안 대표는 당시 아무런 협상이나 조건 없이 박원순 변호사에게 후보 자리를 전격 양보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기존의 정치셈법을 깨는 행보로 이른바 '안철수 신드롬'까지 일 정도였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서는 야권 후보들의 지지율이 부진한 가운데 정치권 밖에 서 있던 안 대표의 지지율이 치솟자, 안팎의 출마 요구가 거셌다. 결국 안 대표는 장고 끝에 2012년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새 정치'를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웠다.

그러나 당시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 논의가 시작되자 고공행진을 이어가던 안 대표의 지지세도 꺾이기 시작했고, 양측간 신경전이 극단으로 치닫는 끝에 안 대표는 결국 대선 후보직을 내려놨다.

그는 "솔로몬의 재판에 선 어머니 같은 심정으로 양보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듯했던 그는 2013년 4월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로 여의도에 입성했고, 2014년 초 새정치연합을 창당했다. 세(勢) 부족이라는 벽에 부딪힌 그가 3월 민주당과 합당해 새정치민주연합을 출범시키자 대선 후보직 양보에 이은 또 하나의 '철수정치' 아니냐는 비판론이 일기도 했다.

이후 안 대표는 김한길 의원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으며 당내 개혁을 추진했으나, 같은 해 7·30 재보선에서 패배하자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전격 사퇴했다. 안 대표는 당이 문재인 대표 체제로 전환되자 '반문'(반문재인) 진영에 서서 혁신을 촉구하다 2015년 말 탈당, 다시 허허벌판으로 나섰다.

이후 국민의당을 창당한 그의 첫 시험대는 작년 4·13 총선이었다.

더불어민주당과 후보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당 안팎의 거센 요구에도 독자노선을 고수한 결과 의석수 38석과 정당득표율 2위(26.74%)로 3당 체제를 구현했고, 안 대표의 존재감은 극대화됐다. 그러나 직후 터진 '홍보비 리베이트 파동'이 발목을 잡았다.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내려놨지만, 지지율이 급락하며 다시 시련을 맞이했다.

올해 초 탄핵 정국에서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등장으로 연대론 요구에 직면했으나 '자강론'으로 돌파하며 국민의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압승했다. 다시 '안풍'을 일으키며 '강철수(강한 안철수)'라는 새 별명까지 얻은 그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추격 양강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네거티브 공방전과 TV토론 등을 거치며 내리막길을 걸었고, 결국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에게도 뒤진 3위로 대선을 마감했다.

실망스러운 대선 성적표를 받아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문 대통령 아들 준용씨에 대한 취업의혹 제보조작 사건이 터지자 단순한 책임론을 넘어 정계 은퇴 압박까지 제기되는 등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내몰렸다. 하지만 그는 '당 살리기'를 명분으로 8·27 전당대회를 통해 다시 당권을 잡았다.

짧다고도 할 수 있는 5년의 기간 안 대표는 두 차례의 창당과 두 번의 대권 도전, 총선과 지방선거 지휘 등 정치인으로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셈이다.하지만 그동안 안 대표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새정치' 이미지 역시 많이 사라진 데다, 현재 국민의당이 처한 상황 역시 녹록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먼저 안팎의 거센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 대표로 나선 그로서는 당장 내년 지방선거에서 납득할만한 성과를 보여줘만 한다. 이후 정치적 행보를 놓고도 고심이 깊을 것으로 보인다. 전대 과정에서 서울시장 등판론이 제기됐지만 안 대표는 아직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안 대표는 그러면서 "이렇게 경험한 것을, 이제 우리 국가와 국민을 써야 한다". 지난 5년보다 더 치열하게 살겠다"며 비장한 각오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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