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영 기자]#1. 엔지니어 A씨는 지난해 11월 평택에 있는 한 전자기기 생산업체에 취직했다. 월급 350만원을 받기로 하고 일을 시작했지만 급여일이 지나도 첫 월급은 나오지 않았다. 사장은 회사가 어려우니 월급을 280만원으로 낮춰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사장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두달, 세달째에도 월급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사장은 계약건이 성사되는 대로 지급하겠다며 차일피일 미뤘다. A씨는 6개월만인 지난 5월 퇴사하고 밀린 급여를 요구했지만 사장은 "자금이 들어오면 처리하겠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두달 가량 실랑이를 벌이다 지난 7월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냈다. 근로계약서상 해석의 다툼으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2. 울산에서 조선협력사를 운영하는 사장 B씨는 조선업황 부진으로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직원들 월급을 주기 어려운 상황까지 몰리자 B씨는 우선 자신의 재산을 지키는 일에 남은 자금을 모두 써버렸다. 직원들 월급은 정부가 운영하는 체당금으로 충당하려는 생각이었다. 체당금은 사업주가 최선을 다하고도 임금을 지급하지 못할 경우 급박한 노동자들의 생계를 위해 국가가 책임지는 제도다. 하지만 B씨는 고의적으로 임금을 체불한 것이 덜미가 잡혀 결국 구속 됐고 직원 200여명은 연휴를 앞두고 임금을 받지 못해 생계를 걱정하는 신세가 됐다.  

#3 서울 중구의 의류제조업체에서 일하는 C씨(38)는 추석 연휴를 꼼짝없이 '빈손'으로 보낼 뻔했다. 사장 김씨가 사업이 어려워지자 지난 4월 말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잠적했기 때문이다. 김 씨는 거주지를 이전하거나 딸 명의의 휴대폰을 사용하는 등 끊임없이 도망가다가 결국 지난 19일 근로감독관에게 체포됐다. 김 씨는 근로자 9명의 임금 및 퇴직금 1억1000여만원을 체불한 상태였다.

최장기간의 추석 연휴로 귀성·귀향 행렬이 본격화된 가운데 임금을 받지 못해 고통을 받고 있는 임금체불 노동자들이 수백만명에 달하고 있다. 이들에겐 돈 쓸일이 많은 추석 연휴가 오히려 고통이다. 명단공개나 신용제재 등 다양한 제재수단이 있지만 실질적인 임금체불 예방을 위해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끊임없이 제기된다.

1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신고된 체불임금 액수는 8909억원, 임금체불 근로자는 21만8500명에 달한다.

이는 체불임금으로 정부에 진정이나 구제를 요청한 공식적(신고된) 임금체불 근로자 숫자다.

임금을 제때 지급받지 못했지만 근로자가 현실적인 불이익을 고려해 신고를 꺼리는 현실을 감안하면 실제 체불임금으로 고통받는 근로자는 훨씬 늘어난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실제 고용노동부에 신고된 임금체불 근로자는 연간 30만명이 넘으며 해가 갈수록 숫자는 늘어나고 있다. 

2013년 신고된 임금체불근로자는 26만6508명 수준이었으나 2014년 29조2558명, 2015년 29조5677명, 2016년 32만5430명으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노동연구원 김근주 연구위원은 "임금체불이 우리 사회에서 고착화되고 있는 것 같다"며 "근로의 대가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임금을 받지 못한다면 근로자의 가계에 주는 충격은 물론이고 경제 전체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말했다.

통상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분쟁의 여지가 생긴 근로자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방법은 고용노동부 진정이다. 근로자가 사업주의 임금체불 등 근로기준법 위반사항을 근로감독관에게 알리고 관련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용부가 해결하는 임금체불 사건은 60% 정도에 그친다. 지난해의 경우에는 32만5430명 가운데 60.9%에 해당하는 19만8392명이 고용노동부 지도해결로 분쟁을 마쳤다. 나머지는 민사소송 같은 법적 분쟁 절차를 거치게 됐다.

정부도 임금체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종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미 발생한 체불임금에 관한 주요한 해결 수단으로는 임금채권보장제도가 있다. 체당금 제도로 대변되는 임금채권보장제도는 임금채권보장기금을 통해 일정 범위의 체불임금을 기금에서 직접 지불해 근로자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하지만 B씨 사례처럼 체당금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고용부 관계자는 "체당금을 눈 먼 돈으로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고의적으로 임금을 체불한 후 체당금으로 충당하려는 일부 사업주들은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강하게 처벌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현재 벌칙 규정, 명단 공개, 임금체불 자료 제공 등 체불사업주에 대한 제재, 대장 작성 의무 등 임금관리 등 다양한 방식의 접근법으로 수많은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돼 있지만 체불임금은 쉽게 줄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상습적으로 임금체불 일삼는 악덕업주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김 연구위원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임금체불 문제를 보면 뷔페식 해결 방식이 실제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 게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임금체불은 근로자와 그 가족의 생계 수단이기에 단순한 채무불이행과 다른데도, 우리 노동현실은 임금체불의 폐해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며 "임금체불 처벌 강화와 함께 상습 임금체불 사업주는 사업 재개를 제재하는 등 강력한 수단이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치권에서도 체불임금 문제에 관심을 높이고 있다. 현재 국회에는 임금체불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임금채권보장법 개정안, 사업주의 체불임금 청산계획서 작성과 제출을 의무화한 근로기준법 개정안 등이 계류된 상태다.
 
국민의당 김삼화 의원은 "국회에 계류된 임금체불 관련 법안이 조속히 통과돼 임금체불 노동자와 그 가족의 시름을 덜어줄 수 있길 바란다"며 "고용노동부는 가장 열악한 지위에 있는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임금체불 해결에 최선을 다해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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