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굳은 표정으로 법정 향하는 서천호
[김민호 기자]‘맡겨진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 한 독일인이 법정에 섰다. 하지만 그에게 맡겨졌던 일은 유태인의 목숨을 빼앗는 일. 전쟁 범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1945년 5월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포로로 잡힌 그는 신분을 속여 풀려난 뒤 아르헨티나로 도망쳤다. 그러나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들에 붙잡혀 결국 예루살렘 법정에 서게 됐다.

1961년 이스라엘 예루살렘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법정에 50대 중반의 평범한 남자가 섰다.

“도대체 무엇을 인정하란 말입니까?”

잡혀 올 당시 그가 하던 일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자동차 공장에서 기계를 고치는 일, 그가 몸에 지니고 있던 신분증에 적혀 있던 이름은 리카르도 클레멘트. 하지만 그의 원래 국적은 독일, 원래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으로 직업은 군인이다.

그는 바로 500만명 이상의 유대인을 희생시킨 이른바 '홀로코스트' 최종 작성자였다. 그는 부하들에게 "500만명의 죽음이 개인적으로 양심에 걸린다는 사실은 엄청난 만족감의 원천이기도 하다"며 "따라서 나는 기쁘게 무덤으로 뛰어갈 것"이라는 충격적인 연설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저는 지시받은 업무를 잘 처리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을 뿐입니다. 제가 제작한 ‘열차’ 덕분에 우리 조직은 시간 낭비 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었죠.”

그가 고안해 낸 것은 가스실이 설치된 열차, 수많은 유태인이 열차에 설치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았다.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까?”

“저는 잘못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제 손으로 죽이지 않았으니까요. 죽이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습니다. 제 권한이 아니었으니까요.
저는 시키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 하나의 인간이자 관리자였을 뿐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정말 느낀 적은 없었나요?”

“월급을 받으면서도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결코 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그의 답변에 이를 지켜본 6명의 정신과 의사들의 판정은  “그는 나보다 더 정상이며 준법 정신이 투철한 국민이었다.”였다.

이후 8개월간 계속된 지루한 재판·은 계속됐고 하나 둘 자리를 떠나는 방청객들 속에서 끝까지 재판을 지켜본 한 철학자가 있었다.

방청을 지켜본 유대계 정치학자이자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그는 아주 근면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 그는 이 말을 잊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그리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이상은 생각 없이 죽음을 방관한 <그가 유죄인 이유>란 책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유대계 정치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악의 평범성'이란 말로 묘사했다. 그는 평범한 군인이자 공무원으로서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을 뿐이지만 이런 행동이 결과적으로 '악'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대해 "그를 최악의 범죄자로 만든 것은 '순수한 무사유'였다"고 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못한 것이 그의 죄라는 얘기였다.

결국 이듬해  아돌프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지난 7일 구속된 서천호 전 국정원 2차장이 검찰의 조사를 받기 전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재직 기간 동안 국가에 충성을 다했다."

서 전 차장은 2013년 검찰의 '국정원 댓글공작'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TF(태스크포스)를 꾸려 위장 사무실과 가짜 서류를 만든 혐의를 받고 있다. 또 국정원 요원들에게 수사와 재판에서 허위 진술을 하도록 지시한 정황이 드러나 구속됐다.

과연 그는 아렌트의 지적처럼 충성도 죄가 된다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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