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배 기자]지금 전세계가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단 한 명을 뽑으라면 단연코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일 것이다.

지난달 24일 폐막한 중국 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은 ‘시진핑 사상’을 당헌에 삽입하고 새 지도부 선임 과정에서 후계 지명을 하지 않아 시진핑 1인 지배 체제를 확고히 했다. 총서기직을 연임한 시진핑은 ‘덩샤오핑의 이론’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마오쩌둥 사상’과 똑같은 반열에 자신의 사상을 올렸다.

한마디로 중국에서의 시진핑은 '교황'에 버금간다. 어떻게 이런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

케리 브라운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라우 중국연구소 소장이 쓴 (원제는 ‘최고경영자, 중국: 시진핑의 부상')은 이런 궁금증의 일부를 풀어준다. 2016년 4월까지의 상황을 다뤄 최근 상황까지 반영된 것은 아니지만, 베이징 주재 영국대사관의 1등 서기관 경력 등 20년간 중국 관련 활동을 해오고 중국 관련 저서를 10권이나 펴낸 전문가답게 나름의 시각을 보여준다.

시징핑의 가족史

올해로 64살인 시진핑은 마오쩌둥 군부의 장성인 시중쉰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진핑은 부모가 전형적 엘리트 계급인 ‘태자당’으로 유치원부터 엘리트 계층의 자녀들과 함께 다녔다. 태자당이란 혁명 원로 자제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만큼 시진핑을 거론할 때 그의 아버지 시중쉰(1913~2002)의 그림자는 매우 크다.

평생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시중쉰의 삶은 아들인 시진핑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시중쉰의 자녀는 2남2녀이다. 시진핑은 차남, 누나 2명은 일찌감치 중국의 개혁개방이 시작됐던 지난 1979년 호주로 이민을 갔고 시진핑의 형은 그냥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요한 점은 아버지 시중쉰이 시진핑을 어려서부터 아주 강하게 키웠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하방'이라는 것이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유배'제도와 비슷한데, 꼭 그렇지는 않다. 시중쉰은 시진핑 나이 15살에 '하방'을 보냈다, 그는 산둥성 산골 마을 토굴에서 무려 5년을 지냈다.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이 뭔지 직접 체험하라는 아버지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었다. 물론 나이어린 시진핑은 중간에 몇 번이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베이징으로 되돌아 오고 했다.

그때 마다 시중쉰은 아무 말 없이 시진핑 앞에 권총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은 언제인가 한번은 죽는다. 이곳에서 죽던가, 되돌아 가던가. 선택하라"고 했다.

아버지 시중쉰은 시진핑에게 늘 말했다. "나의 아버지가 시중쉰이다"라는 말을 절대하지 말아라.

그 말이 아버지 귀에 들어오는 순간, 너는 용서치 않겠다. (참고: 아버지 시중쉰은 중국 공산당 1세대로 모택동 시절 중국 국무원 총리를 지내면서도, 일과 시간 이후에는 관용차를 절대 사용하지 않았던 인물로 유명)라고 했다.

하지만 시중쉰은 출판을 허가한 소설의 내용이 이후 문제가 돼 직위해제됐고, 1966년 문화혁명이 일어난 뒤엔 베이징에서 추방됐다. 시진핑은 문혁 기간 실시한 농촌 하방 정책에 따라 16살의 나이로 가족과 떨어져 시골 지역인 산시성으로 가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79년 칭화대 공정화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에서 ‘중국농촌의 시장화를 위한 법제 건설 연구’라는 논문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편 시진핑 나이 49살에 부친상을 당했다. 그때 상가집에 중국의 수많은 권력자들이 몰려들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자네 아버지가 시중쉰이었느냐고..."

그때부터 시진핑의 출세가도가 열렸다.

 
1983년 관료생활 시작

시진핑은 1983년 행정부의 가장 낮은 단계인 촌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미 군이 주도하는 시대는 갔고 앞으로 관료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내다보고, “폭넓은 경험을 쌓고 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위로 올라가라는 아버지의 조언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라고 지은이는 추측했다.

그는 개혁개방의 최전선이었던 푸젠성의 샤먼, 같은 성의 빈곤 지역인 닝더 등 다양한 지역으로 보내져 능력을 시험받았다. 샤먼 시기에 결혼한 가수 펑리위안 또한 시진핑을 대중이 가깝게 느끼게 하는 이유가 됐다.

겅바오(耿飈) 국방부장의 비서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한 그는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 등 푸젠성에서만 17년 반을 근무하며 정치 경력을 착실히 쌓았다. 2002년 저장성 당 서기 시절에는 마윈의 알리바바 등 지역 기업을 후원하고 외국 기업을 유치해 한해 33%란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하며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

2007년 후진타오가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했을 때, 시진핑은 후임자로 물망에 오른 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2007년 중국의 최고 권력집단인 7인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위원으로 지명받았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준비위원회 의장으로 큰 사고 없이 사상 첫 종합 1위로 올림픽을 치러냈다.

여기서 시진핑이 평생을 새기며 살았다는 한시가 있다.

인생 3중 경계

간밤에 서풍이 심하게 불더니만
푸른 나무들이 다 시들어 버렸네.
나 홀로 높은 누각에 올라
저 하늘 끝까지 펼쳐진
가없는 길을 바라보네

바지끈이 점점 헐렁해져도
끝내 나는 후회치 않으리
그대를 위한 것이라면
내 몸 하나 초췌해진들
그 무엇이 걱정이랴

길거리에서 밀려 넘치는
군중들 속에서
천 번 만 번 그녀를 찾아 헤매었지.
문득 무심하게
고개 돌려 쳐다보니
등불이 희물그레
꺼져가는 그 난간 곁에
바로 그 여인, 서있지 아니 한가

그는 왜 1인자가 됐나

 
그렇다면 시진핑이 2012년 주석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케리 브라운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라우 중국연구소 소장은 부패 문제가 없던 점을 가장 중요하게 꼽았다.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는 시기에 물질적 과실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시진핑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개인적인 이득을 생각하지 않고 당에 헌신”했음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시진핑은 보시라이 같은 실력자들이 부패 문제로 낙마할 때, 가족들이 자신의 권역으로 들어와 사업을 하지 못하도록 극히 조심하면서 자신을 지켰다. 시진핑이 여러 번 반복해온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려는 사람은 정계에 입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그의 이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렇기에 공산당이 교황이나 마오쩌둥처럼 ‘정신적 지주’가 돼야 하는 주석 자리에 시진핑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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