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건 전 국무총리가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고건 회고록 출간 간담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민호 기자]고건 전 국무총리가 회고록을 출간했다.

고 전 국무총리는 2015년 메르스 사태.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대한민국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곳에 있었다. 최근 리더십의 부재 속에서 고건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은 그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그는 2007년 대선 불출마 선언 이후 현실정치 불참여 원칙을 고수하며 침묵했다.

그는 책 속에서 지금은 산업화 반세기, 민주화 사반세기가 지나 선진국 문턱에서 주저하는 지금 새로운 정치경제사회 틀을 만들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러한 시대적 과제를 무시한 보수정부가 오만 불통했기에 민심의 촛불이 켜졌다며 시대발전 흐름을 봤을 때 변곡점에 와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책 속에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등으로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말했다.

“정말 답답했다. 오만, 불통, 무능했고 아버지 기념사업이나 하셨어야 한다. 당사자가 제일 큰 책임이 있겠지만, 그 사람을 뽑고 추동하면서 진영 대결에 앞장 선 사람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라고...

그는 또 말했다.

"박근혜를 검증 안 하고 대통령으로 뽑은 것 아니냐. 보수진영이 이기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진영대결의 논리이고 결과이다. 중도실용을 안 한 것"이라고...

회고록은 고 전 총리가 지난해 본격적인 촛불 정국 도래 직전 박 전 대통령에게 진언했던 일화도 전했다.

"2016년 10월 30일 당시 박근혜 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사회원로 몇 명과 함께 차를 마시며 ‘국민의 의혹과 분노는 한계점을 넘어서고 있다. 성역 없는 수사를 표명하고, 국정시스템을 혁신해서 새로운 국정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진언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촛불집회가 일어나고 탄핵안이 발의, 가결됐다”

책 속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과 국무총리를 맡게 된 배경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적혀 있다.

"1998년 서울시장 민선2기에 출마할 당시, 국민회의 노무현 부총재를 만났다. 인상적이었다. 그의 화법은 매우 담백했다.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드물게 사심이 없는 정치인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총리를 제안하면서 '개혁대통령'을 위해선 '안정총리'가 필요하다 했고, 완강히 고사해도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 '해임제청권뿐만 아니라 실질적 내각인선까지 맡아서 해달라면서 다만 법무부 장관은 이미 생각해 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강금실 변호사였다"

37세 최연소로 전남도지사가 되는 등 늘 '최연소' 타이틀을 달았던 고 전 총리는 "나보다 나이 어린 상사를 둔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기록했다.

책 속에는 자신의 지난 2007년 대선 불출마 선언에 대해서도 말했다.

“제일 큰 불출마 요인은 중도실용의 기치를 내걸고 내 정치세력을 못 만든 것이고, 또 하나는 호남 출신의 한계론”이라고

“나의 정치적 실패를 놓고 보면 중도실용의 정치가 설 자리도 좁았지만, 비정당 출신 제3의 정치인이 설 자리가 더 좁았고 참여정부의 총리를 해서 진보 쪽으로 포지셔닝이 된 상황에서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이 발생하니 역부족이었다”라고.

그러면서 “북한 핵실험으로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었고 열린우리당이 아무리 간판을 바꿔도 떨어지는 건 확실했다”며 “다음 대선에 재수로 후보가 돼야 하는데 나이가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대통령이 됐던 만 73세보다 많아지는 거다. (난) 노욕을 덮어버릴 만큼 권력의지가 강하지 못했다”라고 썼다.

책 속에 고건은 말한다.

정치의 시대에 ‘생활’을, 침묵의 시대에 ‘소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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