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승국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
지난 2000년부터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되면서, 많은 고위 각료들이 청문회장에서 자신의 과거가 벌거벗겨진다. 그런데 청문회를 깨끗하게 통과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대부분 크고 작은 흠으로 곤욕을 치룬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나고 새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에서도 어김없이 많은 각료 후보자들이 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렀고, 결국 안경환 법무부장관 후보자, 조대엽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는 청문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사퇴하였다. 아마 임명된 장관들 중에도 청문회에서 발가벗겨진 자신의 민낯에 마음이 편치 않을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청문회 때마다 자신의 개인 이력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부담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들이 이를 원치 않아 후보로 제청되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그 동안 대한민국이 짧은 기간 안에 압축 성장을 해오면서 도덕보다는 물질 만능의 사회가 되고, 심지어는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어떠해도 좋다는 의식이 형성된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사회 지도층의 사람들도 노블리스 오블리제 보다는 자기 개인의 욕심 채우기가 우선이 되었기에, 청문회 때마다 이런 사태를 겪게 되는 가 보다. 더구나 교육에 있어서도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교육보다는 1등주의 교육을 위주로 한 것이 그런 의식을 더욱 조장한 것이 아닐까?

그러면 과거 조선에서는 어떠했을까? 유학을 국시로 하여 검소한 멋을 추구한 조선, 그래서 청빈(淸貧)한 선비를 존경한 조선에서는 더욱 이러한 흠결이 드러난 관리는 버티기 어려웠을 것 같다.

물론 조선도 후기로 넘어가면서 이런 유학의 이념이 무색할 정도로 탐관오리가 많아졌지만, 적어도 조선 전기 특히 세종대왕 시절에는 왕과 신하들이 사심을 버리고 일심으로 조선 건국의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기에, 이런 관리는 임관되기도 쉽지 않고, 중간에 흠결이 발견되면 버티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듯이, 세종 때 정승의 반열에 올랐던 조말생(1370~1447)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조말생은 뇌물을 받고 벼슬을 주거나 승진을 시켜주는 일이 많아, 이를 고발하는 상소문이 이어졌었다고 한다.

조말생이 받은 뇌물은 노비 48명, 땅 4결(약 100만 평방미터), 은병 수천근 등으로 이를 합치면 780관에 달하는 액수라고 한다. 당연히 조말생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았고, 심지어 사간원에서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세종은 조말생을 단지 귀양보내는 것에 그쳤다. 그것도 귀양 기간은 고작 2년에 그치고, 2년 후에는 조말생을 다시 복귀시켜 동지중추원사, 함길도 관찰사 등을 맡겼다.

우리가 대왕으로 칭송하는 세종이 왜 이런 처사를 했을까? 그것은 조말생의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조선 건국 초기라 명나라와 외교문제가 중요했고, 또한 동북방에서는 여진족이 국경을 시끄럽게 할 때다.

이 때 명나라와의 외교와 여진족에 대한 국방 문제에 있어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 조말생이라 한다. 그렇기에 어떻게 하든 조선을 확고한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고 노력하던 세종으로서는 이러한 조말생의 능력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조말생과 같은 부패관리도 귀양 보내었다가 다시 2년 만에 불러들인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조말생은 세종이 이렇게 자신을 믿어주면 조용히 자숙하며 열심히 국가에 봉사만 할 것이지, 세종의 신임을 기화로 자신에게 내려진 유죄 판정을 번복시키려고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세종이 그러한 조말생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조말생의 무덤이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다. 강북 강변도로가 워커힐을 지나고 구리시 왕숙천을 건너면 강변의 조그만 야산을 만나는데, 여기서 강변도로는 야산을 왼쪽으로 비껴가며 강변도로의 역할을 끝낸다. 이곳 야산 일대가 남양주시 수석동인데, 야산의 꼭대기 부근에는 조말생이 소속된 양주 조씨 종중의 선산이 있고, 조말생의 무덤은 강변에 접한 야산 둔덕 위에서 한강과 덕소, 미사리 일대를 바라보고 있다.

얼마 전에 조말생의 무덤과 신도비가 여기 있다는 얘기를 듣고, 요양원에 계신 어머님을 보러 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 그런데 야산 입구 마을의 안내판에는 삼국시대 토성인 수석리 토성밖에 안 나와서, 일단 이곳부터 찾기로 했다. 근처에 조말생 무덤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여기를 찾으면 조말생 무덤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안내판을 보고 올라간 야산의 중턱에서 길이 끊겨졌다. 남양주시에서 길을 만들다 만 것이다. 할 수 없이 풀숲을 헤치고 올라가니 생각지도 않던 양주 조씨 선산을 보게 되고, 그 선산을 넘어가서야 겨우 수석리 토성과 조말생 신도비 안내 표지판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엔 수석리 토성을 먼저 보려고 하였다. 그래서 표지판이 가리키는 쪽으로 올라가니, 희미한 길은 거미가 허공에 겹겹이 줄을 치고 먹이를 기다리고 있다.

처음 두 번은 거미들의 생존 줄을 무참히 끊으면서 전진하였는데, 결국 계속 나타나는 거미줄에 항복하고 돌아섰다. 가보았자 토성의 흔적은 별로 안 남고, 안내판 하나 달랑 있는 정도일 것이라, 그 정도에서 포기한 것이다. 안내 표지판을 제대로 달아줄 수 없는 것인가? 남양주시가 건성으로 안내 표지판을 달고 길도 제대로 트지 않아, 오늘 고생 많이 하누나. 교회 끝나고 어머니한테 가던 길이라 옷차림도 양복 바지에 구두인데... -_-;;

 
속으로 ‘XX XX’하면서 이번에는 조말생 신도비 안내 표지판을 따라 간다. 다행히 조말생의 무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신도비는 보이지 않는다. 조말생 무덤 앞은 한강이 탁 트인 것이 보기에도 시원스럽다.

조말생은 말년에도 영화가 계속되어 1442년에는 숭록대부가 되고 죽기 1년 전에는 영중추원사가 되었다는데, 그래서인지 조말생은 선산에서 홀로 떨어져 이렇게 한강으로 앞이 확 트인 넓은 자리를 독차지하고 한강을 바라보며 죽어서도 부귀를 누리고 있는 것 같다.

이번 문재인 정부 청문회를 거치면서도 능력이 우선이냐 도덕적 품성이 우선이냐로 논란이 있지 않았던가? 능력만 출중하면 사람 됨됨이는 상관없다는 주장은 물론 말도 안 되겠지만, 근본주의 청교도 국가나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처럼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문제가 있을 것 같다. 둘의 조화를 찾아야 할 텐데,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국가를 위해서 올바른 방법일까?

 

저작권자 © 시사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