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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필리핀의 神’이 된 사나이 매니 파퀴아오
김승혜 기자  |  sh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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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26  14: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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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혜 기자]세계프로복싱 8체급 석권에 빛나는 복싱 전설 매니 파퀴아오(Manny Pacquiao) 필리핀 상원의원이 '서울 글로벌 대사'가 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6일 오전 11시55분 시청을 첫 방문하는 매니 파퀴아오 상원의원을 만나 서울 글로벌 대사로 위촉했다.

서울 글로벌대사는 분야별로 전문성과 영향력을 갖춘 해외 유력인사들로 구성된 친서울 글로벌 네트워크다. 서울시에 대한 정책자문과 해외 도시와의 우호협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파퀴아오는 세계 복싱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1995년 프로 복서로 데뷔한 이후 복싱 역사상 전무후무한 8체급 챔피언에 올랐다(68전 58승(38KO) 2무 7패).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와 함께 복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챔피언으로 인정받는 전 세계 최고의 스포츠 스타 중 한 명이다.

파퀴아오는 권투 역사상 최초로 8체급 석권을 통해 얻은 부와 명성을 기반으로 정치계에도 비교적 성공적으로 입문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역 하원의원인 파퀴아오는 그동안 대권 야망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는 지난 2013년 대선에 도전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시 그는 대통령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면서도 "너무 먼 일이다. 신의 뜻이다"고 덧붙였다.

파퀴아오의 미국인 프로모터 밥 아룸이 최근 연예매체 'TMZ'에 자신의 고객(파퀴아오)이 뚜렷한 대선 출마 전략을 짜고 있다고 말하면서 파퀴아오의 대선 출마설이 재촉발됐다.

2015년 아룸은 TMZ에 "파퀴아오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며 "2016년 상원에 출마하고 늦어도 2022년 대통령에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지난해 상원의원이 됐다.

시사플러스에서 지난 2015년 SBS 보도 내용을 중심으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파퀴아오’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조명했다.

◇ 전설 파퀴아오는 누구?

파퀴아오는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길거리를 전전했고, 무작정 상경한 뒤 링 위에 올라 두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스포츠스타로 꼽히는 그는, 과장 조금 보태서 조국 필리핀에서는 신(神)과 거의 동급 대접을 받는다. 파퀴아오를 잘 모르거나 복싱에 관심이 없더라도 그의 이야기는 전 세계를 뛰어넘어 사람을 끌어들이는 특별한 감동과 매력이 있다.

파퀴아오는 1978년 12월 17일, 필리핀 민다나오 섬의 제너럴 산토스 시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가끔 TV로 접하는 동남아 시골 마을의 헐벗은 어린 아이가 바로 파퀴아오의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퀴아오는 코코넛 나무로 지붕과 벽을 만든 야자나무 오두막집에서 홀어머니와 여러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았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빈곤과 싸운 어린 시절이었다. 이른 새벽마다 어머니의 묵주 기도를 들으면서 “우리가 자라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하는 물음을 날마다 마음에 품었다고 파퀴아오는 회상한다.

그는 5살 때부터 바닷가에 나가 일을 했다. 어부들의 일을 돕고 물고기를 나눠 받았다. 12살에는 아예 소년 가장이 됐다. 초등학교 6학년을 중퇴하고, 길거리에서 도너츠와 담배 등을 팔았다고 한다. 복싱을 처음 접한 건 그 무렵이었다. 얹혀살던 삼촌에게 처음 복싱을 배웠고, 동네 공원에서 스파링도 벌였다.

파퀴아오는 복싱에 재능을 보였다. 금방 두각을 드러냈고 나름 대전료도 받았다. 첫 대전료는 단돈 2달러였다. ‘2달러’를 대전료로 받던 소년이 훗날 한 번의 경기로 얼마를 받게 될 지는 그때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13살이 되던 해, 파퀴아오는 사흘 동안 밀항선을 타고 수도인 마닐라로 상경한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당시 파퀴아오는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죄송해요 어머니. 마닐라에 가겠다고 하면 허락을 안 해주셨을 거에요. 하지만 이렇게 해야 우리가 돈을 벌 수 있어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소년이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부모님 전상서를 남기고 서울로 향하는 이 레퍼토리는 우리에게도 딱히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다.

13살 소년이던 파퀴아오에게 복싱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두 주먹에, 그야말로 모든 걸 걸었다. 그렇게 기적같은 커리어가 시작됐다.

링에서 먹고 자며 복싱을 연마한 파퀴아오는 1995년, 18살의 나이로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사실은 18살이 아니라 16살이었다. 18살 전에는 프로에 데뷔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이를 속인 것. 몸무게도 기준 체중에 모자랐기 때문에 주머니에 무거운 잡동사니를 잔뜩 넣은 채 저울 위에 올랐다고 파퀴아오는 회상한다.

이후에는 연승 가도를 달렸다. 데뷔 첫 해에는 10번 싸워 10번 모두 이겼다. 단 한 차례 부상으로 인한 패배를 제외하고는 데뷔 2년만인 1997년 동양타이틀을 획득했고 3년째인 이듬해 드디어 첫 세계타이틀(WBC 플라이급)을 따냈다. 재미있는 것은 파퀴아오의 연승 상대에 우리나라 선수들도 있었다. 96년과 97년, 2000년에 각각 우리나라의 이욱기, 이성열, 채승곤 선수와 맞붙었는데 모두 KO 또는 TKO승을 거뒀다.

체급을 올려 슈퍼밴텀급에서도 세계챔피언을 차지한 파퀴아오는 5차 방어까지 성공한 뒤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평생의 동반자가 될 명트레이너 프레디 로치를 만난다. 프레디 로치는 한때 잘 나가던 복서였지만 몸을 혹사한 탓에 파킨슨 병을 앓고 있었다. 어쨌든 이 명트레이너는 천재 선수의 재능을 금방 알아봤다. 그는 55kg의 자그만 소년을 세계 최고의 복서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 해 6월, 파퀴아오는 역사적인 라스베가스 데뷔전을 치뤘다. 상대는 ‘남아공의 킬러’라고 불렸던 IBF 슈퍼밴텀급 세계챔피언 레드와바였다. 당시 방어전을 치러야 했던 레드와바는 2주 전까지 도전자를 구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파퀴아오는 이른바 ‘급조’된 상대였다. 당시 중계방송의 오프닝은 인상적이었다. “상대는 매니 파카이... 아니 정정하겠습니다. 파퀴아오입니다” 멀리 필리핀에서 온 조그만 복서의 이름을 캐스터가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파퀴아오는 링 위를 지배했다. IBF 세계챔피언 레드와바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다시피 했다. 여유ㅛ만만했던 흑인 복서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됐고, 보다 못한 주심은 6회 TKO를 선언하고 말핬다. 송곳 같은 펀치를 끊임없이 쏟아 붓는 파퀴아오의 인상적인 경기 스타일에 라스베가스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후 인지도를 높여가던 파퀴아오는 세계 중경량급 복싱을 호령하던 ‘멕시코 3인방’ (안토니오 바레라, 에릭 모랄레스, 후안 마누엘 마르케스)을 잇따라 꺾으며 세계적인 복서로 자리매김했다. 그것도 대부분의 경기를 일방적으로 주도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페더급 최강으로 꼽히던 바레라는 파퀴아오에게 얼마나 두드려 맞았던지, 바레라의 트레이너가 눈물을 흘리며 경기를 중단시킬 정도였다.

주 무대였던 미국 복싱 팬과 전문가들도 키 169cm의 이 조그만 아시아 출신 복서에게 열광했다. 그동안 미국 복싱 선수들이 넘지 못했던 멕시칸의 벽을 파퀴아오가 넘자 대리만족을 했다는 분석도 있지만, 질 때 지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펀치를 쏟아붓는 저돌적인 파이팅은 모두가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파퀴아오는 2008년 12월, 세계 최고 수준의 거물과 만난다. 미국 국적의 ‘골든 보이’ 오스카 델라 호야가 그 상대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호야는 6체급에서 10번의 세계 챔피언을 지냈고, 은퇴 이후에도 복싱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그야말로 ‘전설’로 꼽히는 선수이다. 당시 호야는 전성기가 지난 상태였지만, 그래도 세계가 주목할 만한 대결이었다. 일각에서는 파퀴아오가 ‘멕시코 3인방’을 줄줄이 꺾자 히스패닉계인 호야가 싸움을 제의했다고도 한다.

이 대결이 얼마나 주목을 받았는지, 역설적으로 파퀴아오의 조국 필리핀에서는 반대 운동까지 일어났다. 파퀴아오는 이미 필리핀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되어 있었고, 많은 필리핀 사람들은 파퀴아오가 호야에게 질까봐, 아니, ‘맞아 죽을까봐’ 염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파퀴아오가 플라이급에서 출발한 단신(短身)이었던 반면, 호야는 미들급 챔피언을 지낸, 파퀴아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선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필리핀에서는 ‘국가의 자부심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파퀴아오의 경기 출전을 금지하는 법안이 발의될 정도였다.

막상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 시작되자 우려는 환호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다윗은 골리앗을 사정없이 코너로 몰아붙였다. 호야의 얼굴은 라운드를 거듭할 때마다 부풀어 올랐다. 8라운드가 끝나자 호야는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됐고, 주심은 결국 파퀴아오의 TKO 승리를 선언했다. 복싱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 순간이었다.

   
 
◇국회의원, 농구 감독…최고의 스타가 되다

파퀴아오는 그렇게 한동안 전성기를 이어가며 세계적인 복싱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복싱이 침체된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못한 면이 있지만, 파퀴아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포츠 스타 최상위권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고 있다. 조국 필리핀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파퀴아오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나라 전체가 마비 상태가 될 정도였다.. 필리핀 정부군과 반군도 내전을 멈추고, 범죄율을 제로로 떨어지고, 거리에는 차가 다니지 않았다. 지난 2013년 태풍 하이옌으로 필리핀 일부 지역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을 때도, 이재민들이 모여 파퀴아오의 경기를 보는 장면이 외신을 통해 전해지기도 했다.

2009년에 그는 우리나라의 국회의원 격인 필리핀 하원 의원에 당선돼 정치에 입문한다. 사실 파퀴아오는 이전에도 하원 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적이 있는데, 상대 후보의 선거 표어가 “파퀴아오를 더러운 정치판에 들이지 말자”였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은 파퀴아오와 함께 찍은 사진을 포스터로 내세우고 어떻게든 인연을 맺으려고 했다. 필리핀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파퀴아오고, 그 다음은 파퀴아오의 코치인 프레디 로치, 그 다음이 대통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끊임없이 대선 출마설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연예계에서도 최고의 스타로 대접받았다. 가수로 앨범을 내고 영화에도 출연했다. 엄청난 횟수의 광고 출연으로 ‘파퀴아오 경제 효과’를 따로 추산할 정도였다.

지난 2014년에는 프로농구팀에 감독으로 참여했고 농구 선수로 실제 경기에 출전하기도 하며 다양한 행보를 이어갔다.

폭넓은 행보만큼이나 통 큰 선행도 잊지 않았다. 지난 2013년에는 태풍 하이옌으로 고통받는 이재민들을 위해 대전료로 받은 191억 원을 전액 기부했고 지금도 파퀴아오 재단을 통한 자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흠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은 끊었다고 선언했지만 한때 술과 투계(鬪鷄)도박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했고 탈세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퀴아오는 적어도 필리핀 안에서는 단언컨대, 신(神)에 가장 다가선 인물이라는 것이다.

◇ 파퀴아오: 끝없는 도전

파퀴아오는 이후 잠시 내리막길을 걸었다. 지난 2012년 치른 2경기에서 모두 패배를 당하며 주춤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던 마르케스와의 경기에서는 6회 충격적인 KO 패배를 당했다. 턱을 맞고 완전히 드러누운 파퀴아오의 모습에 ‘이제 끝났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파퀴아오는 보란 듯이 재기했다. 곧바로 이듬해 브랜든 리오스를 상대로 웰터급 챔피언벨트를 되찾았고 이후에도 연승을 거두며 복귀 이후 3연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전성기는 지났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였다. 나이도 불혹을 바라보는 37살에 다다랐다.

그리고 파퀴아오는 이제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세기의 대결’ 앞에 섰다. 21세기 최고의 복서로 꼽히는 ‘무패 전설’ 메이웨더가 그 상대였다. 5년 동안 말만 무성했던 경기를 성사시키기 위해 더 적은 대전료를 받기로 하고 (물론 그 액수도 천문학적이지만) 언더독(Underdog), 즉 도전자의 입장에 섰습니다. 도전자의 입장이 불만족스럽지 않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오히려 좋다고 생각합니다. 2008년 이후로 아주 오랜만에 도전자의 입장에 서기 때문에 오히려 더 동기부여가 되고 용기와 집중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파퀴아오의 인생은 ‘도전’ 그 자체로 요약된다. 필리핀 빈민가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상경해 링 위에 올랐고, 세계무대를 두드려 세계챔피언이 됐다. 플라이급부터 끊임없이 체급을 올려 사상 최초로 8체급을 석권한 것은 인간 한계에 도전해 아예 넘어선 것으로 평가된다.

딱히 잘 생기지도 않았고 영어도 유창하지 않은 필리핀 출신의 이 자그마한 남자에게 세계가 열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굳이 세계를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감동을 느끼고 이 남자를 응원할 수 있는 건 그가 걸어온 길, 또 그의 이야기가 가진 힘 때문이다.

‘밑바닥에서 시작한 남자의 성공 신화, 그 가장 완벽한 현실 버전’에 아마 누구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대입해 보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결의 승패를 떠나, 파퀴아오의 ‘끝없는 도전’이 기대되는 이유, 그 어떤 영화보다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클라이맥스가, 머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번 '서울 글로벌 대사'가 된 것도 그가 2022년 대통령을 향한 '계단오르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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