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2월15일 오후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대한체육회 후보로 출마한 최만립, 장경우, 유준상 후보(왼쪽부터)가 박용성 대한체육회장 후보의 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이날 기자회견에서 3명의 후보는 경제만 전념하겠다고 약속한 박후보가 자숙하기는 커녕, 체육계 수장을 맡는 다는 것은 저항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며 대한체육회장 후보를 사퇴하고 가족화합과 경제살리기에 몰두하라며 사퇴를 촉구 했다.

나의 대학생활은 참 엉뚱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교실보다는 체육관을 좋아했던 나는 결국 대학에 가서도 체육관, 그 중에서도 축구부에서 살다시피 했다.

내가 엉뚱하다고 말한 건 그러면서도 내가 결코 축구선수가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대학 축구부면 국가대표 선수들이 쟁쟁한 마당인데, 기계체조 조금 한 내가 낄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고려대 축구부의 역사에서 나의 존재는 빠질 수가 없다.

축구부의 이단아! 그 이상한 인연으로 하여 훗날 대한 축구협회 부회장이 되어 쿠알라룸푸르에서 난데없이 스트립쇼까지 벌여야 했으니 그 또한 어디에 있건 꼭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는 나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다.

서울대가 아니면 대학도 아니다?

<김대중 죽이기>와 ‘대단한 독설’로 유명한 강준만 교수가 쓴 책 중에 <서울대의 나라>라는 책이 있다. 이른바 ‘서울대의 오만과 패권주의에 도전장을 내민다’는 야심찬 책이다. 강교수에 따르면 이 나라는 바로 ‘서울대의 나라’다. 서울대면 다 통하고 서울대 출신의 학맥에 의해 이 나라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치밀하게 제시하는 데이터들을 보면 ‘좀 심한데!’ 싶어지는 부분도 적지 않다. 특히 강교수가 꼬집는 ‘서울대 병’은 아주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워낙 무소불위 효과를 갖다보니 모든 사람이 일단 ‘서울대’하면 한 수 접고 본다는 것이다.

강준만 교수는 서두에 자신이 서울대를 도마에 올려놓으면 사람들은 일단 서울대 못 나온 사람이 하는 푸념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며, 그 도한 이 나라 사람들이 ‘서울대 병’이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자신이 서울대를 나왔으면 자신이 하는 얘기가 더 설득력이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는 것이다. 참 대단한 자신감이요 독설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여기에서 그 ‘유명한 독설가’, 그래서 유난히도 적이 많다는 강교수의 책 얘기를 꺼낸 것은 그 의견에 공감하고 안하고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의 말을 빌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아니 대학 1학년 때까지 대단한 ‘서울대 병’에 걸렸었다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이다.

당시 우리는 아니 적어도 경기고등학교에서는 서울대가 아닌 대학은 대학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게 ‘병’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병치고는 참 어처구니 없는 병이었다.

고대생의 막걸리

나의 입시 준비는 불과 6개월을 남겨 두고 시작됐다. 의정부 사건을 겪으며 뒤늦게야 부랴부랴 책을 한꺼번에 다 쌓아둔 채 차례대로 한 권 한 권씩 외어가는 식으로 입시를 준비했으니 성적이 잘 나왔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극구 서울대만을 고집했다. 당시 나의 담임은 남규로 선생님이었는데 나중에는 내가 하도 서울대를 고집하니까 마지못해 서울사대를 추천해줬다.

그러나 그것은 또 내가 싫었다. 법대나 상대를 써달라는 것이었는데 선생님은 안된다는 것이었고, 아무튼 입시원서를 가지고 그 선생님과 퍽이나 오랫동안 씨름을 했다. 정이나 안 써 주시니 이제 재수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외삼촌이 갑자기 찾아오셨다. 외삼촌이었던 이상천 교수는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고려대 대학원이 회계학 강의ㅣ를 맡고 계셨었다.

당시 고려대 경영학과의 학과장이던 윤병욱 교수와 아주 절친한 사이였는데 그 외삼촌이 나에게 고려대 진학을 권해 오신 것이다. 내가 경영학을 하고 싶어하고 또 윤교수처럼 좋은 선생님이 있으니 그 곳으로 가라는 것이다.

그 말이 내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그러나 부모님과 외삼촌이 나서서 권하시는데 그걸 또 극구 사양하는 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그래 가자, 일단 가 놓고 다시 재수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재수가 어디 그렇게 쉽다던가. 게다가 진학만 해놨지 나는 여전히 아이스크림 친구들을 만나 놀기에 바빴다. 그 때 친구 중에는 한승주와 김평환이 재수 중이었는데 자연히 그 친구들과 더 자주 어울렸다.

특히 대단한 재주꾼으로 노래면 노래, 피아노면 피아노 그 무엇 하나 빠지지 않던 한승주는 거의 프로급 당구 실력자였다. 여자같이 귀엽게 생긴 친구가 또 어떻게나 여학생들을 잘 사귀는지 ‘연애박사’라며 놀려대곤 했던 친구였다. 그 친구 역시 말로는 재수한다 했지만 공부는 뒷전이었다.

우리는 한승주의 당구시합의 비서 겸 대변자로 뭉쳐 다니면서 그 친구의 ‘눈부신’활약상을 만끽하는가 하면, 대학에 잘 다니고 있는 친구들까지 불려 내 놀러 다니기에 바빴으니 참 한심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학교에 정을 못 붙이고 밖으로만 돌다 만난 것이 바로 ‘축구’였다.

그리고 나는 축구를 통해 비로써 고려대생이 되어갔다. 나중에는 일 년 열두 달. 죽으나 사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리가 모택동 모자라고 불렀던 교모와 교복을 입고 다니게 되었고, 차츰 나의 교복에서도 그 특유의 막걸리 냄새가 자연스레 베어나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만약 내가 재수를 해서 서울대에 갔다면 아마 나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인생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고려대 출신이라는 것이 무한히 자랑스럽다는 것이고, 그것은 내가 서울대에 갔다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소중한 것들을 고려대를 통해 만났기 때문이었다.

축구부의 매니저(?)

내가 진학한 61년도에는 고대와 연대간의 그 유명한 정기전이 중단된 상태였다. 정기 전 도중 싸움이 일어나는 바람에 정기전은 고사하고 양교 다 모든 대회에 출전 금지령이 내려진 것이다. 그런데 2학년 초에 들어서 오랜만에 축구 경기가 있었다. 물론 정기전은 3학년에 들어서야 부활될 수 있었지만 아무튼 오랜만에 펼쳐진 그 경기는 대단한 화제를 몰고 왔다.

당시 우리 과에는 ‘전강문’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바로 고려대 축구팀의 대표선수였다. 학교에도 잘 안 나가던 나는 우연히 축구경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과 친구들과 함께 전강문을 응원한다며 경기장을 찾게 되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뭐가 되었든 한 번 시작하기만 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몰입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내 성격이다. 응원을 다니면서 차츰 축구부원들과 친해지기 시작하자. 나는 아예 축구부에서 살다시피 하게 되었다. 꼭 원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축구부 주변의 일에 끼어들게 된 것이다. 게다가 3학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정기전이 부활되자 내가 할 일은 더욱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축구부의 매니저처럼 되어버렸다. 사소하게는 시험 때 축구부 선수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일부터 크게는 우수한 고교 선수를 스카우트 해 오는 일까지, 축구부에 관련된 일에 내가 관계되지 않는 일은 없었다.

특히 기억에 나는 것은 3학년 때의 스카우트 쟁탈전인데 그 때는 정말 대단했었다. 흡사 007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였는데 그 때 치열한 경쟁을 뚫고 우리가 스카우트에 성공한 선수가 바로 김정남 감독과 정강지 선수였다.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축구 스타가 되어 있는 두 선수였으니 오죽 경쟁이 심했겠는가. 대학팀은 물론 각종 실업팀에서도 ‘눈독’을 들이고 있는 마당이었다.

그럴 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우선 선수에게 호감을 사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기나긴 설득작전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의 ‘마음’을 선점하면 일단 일은 반 절 정도 끝난 셈이다.

사실은 그 다음의 일이 더 어렵다. 그 선수를 지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선 다른 팀의 사람들과 만날 기회를 가급적 막아야만 한다. 아무리 마음으로는 돌아섰다 해도 막상 또 다른 얘기를 듣다보면 흔들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선수를 안전한 ‘안가’에 모셔두어야만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아예 숨겨두는 것이다.

그 때 정강지 선수를 모셔두었던 ‘안가’는 다름 아닌 아이스크림 친구인 한승주의 집이었다. 당시 한승주는 재수한다며 당구장에서 일 년을 버티더니 결국은 고려대에 1년 늦게 진학 해 함께 다니고 있었다. 바로 한승주의 집이 스카우트 쟁탈전의 ‘안가’로 사용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강지 선수는 ‘무사히’고려대로 올 수 있었다.

김정남 감독 역시 그에 못지않는 작전을 통해 겨우 ‘모셔’올 수 있었는데, 그 때부터 이미 정이 들어서인지 두 선수와는 지금까지도 친형제의 정을 나누고 있다.

특히 정강지 선수의 집은 진주였는데 시합이 없을 때는 아예 우리 집에서 살 정도였다.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설날이면 꼭 잊지 않고 어머니에게 세배를 드리러 온다. ‘형! 저 왔습니다!’를 외치며 들어오는 모습은 그 때나 지금이나 어쩌면 그렇게 변함이 없는지.

또 하나 잊지 못할 일화는 김정남 선수의 ‘결혼투쟁’이다. 김정남 선수가 4학년 때니까 내가 군대에 있을 때였다. 하루는 휴가를 나와 학교에 들렀더니 후배들이 쫒아와 ‘정남이 큰일났어요’하는 것이 아닌가. 집에서 결혼을 안 시켜준다고 수면제를 먹었다는 것이다. 한창 뛰어야 할 선수가 수면제를 먹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달려가 보니 정남이는 이미 퇴원해서 집에 누워있었다. 나는 어찌나 화가 나던지 대뜸 꽥하고 소리부터 질렀다.

“너 미쳤냐!”

그런데 이 친구 멀뚱하게 내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눈을 찡끗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걸작이다.

“형! 이거 가짜야!”

집에서 하도 결혼을 반대하니까 그 연극을 한 것이다. 결국 부모님을 설득하는 ‘밀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결혼이 무사히 성사되었음은 물론이다.

김정남 감독은 그런 사람이다. 겉으로는 굉장히 내성적으로 보이고 조용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그 가슴 속에는 그 누구도 끌 수 없는 불같은 것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특히 김정남 감독의 축구 사랑이 얼마나 열정적인 것인지도 나는 잘 알고 있다. 정남이는 보성 중 출신인데 당시 보성고에는 축구부가 없었다. 결구 정남이는 남들이 다 좋다는 보성고를 포기하고 한양 공고를 갔다. 단 하나 축구가 하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김정남 감독이 뽑아놓은 후배들 중의 하나가 바로 차범근 감독이다. 나는 이미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때여서 그 스카우트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스카우트를 아주 잘해 온 선수’로 소개 받았던 기억이 난다.

후배들과 전체 모인 자리였는데 그 때만 해도 내가 대 선배였고 그러다보니 어려운 자리였을 것이다. 차범근 감독의 첫인상은 ‘아주 과묵한 선수’라는 것이었다.

정작 차감독과 가까워진 것은 내가 정치에 입문하고 난 이후다. 내가 11대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첫발을 디딘 후 재경위 소속으로 독일에 갔을 때 만난 것이다. 독일에서 뛰고 있는 모습이 어찌ㅐ나 자랑스럽고 또 반갑던지, 우리는 그 날 밤이 새도록 술을 마셨다. 한국의 소주와 비슷한 ‘아인짜인’이라는 술이었는데 해외여행 하면서 그렇게 술을 마셔보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차감독과는 최근까지도 아주 가깝게 지내고 있다. 이제는 그 친구가 워낙에 바쁜 사람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지만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월드컵 예선전으로 나라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을 때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그 때 차감독은 ‘국민의 기대는 크고...부담스럽다’는 말을 했다.

물론 우리 축구팀은 아주 성공적으로 예선전을 잘 마쳤다. 그러나 차범근감독의 어깨가 너무 무겁다는 것이 자꾸만 안쓰러워지는 건 선배로서 또 어쩔 수 없는 감정인가 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차감독이 있는 한 아주 잘 할 것이라는 것을..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시사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