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혜 기자]박근혜 전 대통령의 삶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을 빼놓곤 설명할 수 없다. ‘대통령의 딸’, ‘퍼스트레이디 대행’, ‘첫 부녀 대통령’ 등 그를 상징하는 대표적 표현 모두 아버지와 묶여 있다.

그는 아버지가 제5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한동안 청와대에 들어가지 않다 성심여중 2학년 때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1974년 8ㆍ15 광복절 경축 행사에서 문세광에게 저격당하고 22살에 퍼스트레이디 대행 역할을 맡았다.

1979년 10월26일 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당했고, 그는 9일장을 치른 뒤 청와대를 나와야 했다.

그는 그렇게 대통령의 딸로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18년을 청와대에서 지냈다.

그가 청와대 밖으로 나오자 시련의 계절이 기다렸다. 1980년 영남대 이사장을 맡았지만 학생들의 반발로 7개월만에 물러났다. 제5공화국이 들어서고 정통성이 취약했던 전두환 대통령이 박정희 격하를 시도하면서 ‘폐족’으로 전락했다. 박정희 사람들이 전두환 사람들로 변모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배신의 정치’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게 됐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야 박정희ㆍ육영수 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키는 등 아버지 복권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최태민 목사 전횡 논란과 함께 불거진 동생 박근령과의 육영재단을 둘러싼 갈등 등 시련은 계속됐다.

또 그렇게 18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그는 1997년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요청에 따라 정계입문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듬해 대구 달성 재보선을 통해 처음 여의도에 입성했다. 2002년 이회창 총재의 1인 체제를 비판하며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지만 지방선거 참패 뒤 다시 당으로 복귀했다.

2004년 ‘차떼기 파문’으로 흔들리던 당의 대표를 맡아 ‘천막당사’를 발판으로 구원했다.

2011년 또다시 위기에 몰린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을 맡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는 등 쇄신작업을 벌여 불가능해보였던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

결국 그는 18년의 은둔생활 끝에 2012년 제18대 대선에 승리했고 ‘옛집’ 청와대에 들어갔지만 정치 입문 18년 만에 탄핵을 당한 대통령으로 ‘법자(법무부 자식)’의 신세가 됐다.

그리고 그에게 붙은 범죄혐의는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강제모금, 기업을 상대로 한 직권남용·강요 등 18가지였다.

2018년 1월 4일, 검찰은 그에 대해 18개 범죄혐의에 국가정보원 뇌물 혐의를 추가해 기소했다.

그에게 따라다닌 숫자 ‘18’의 묘한 인연이 깨지는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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