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기자]역린을 건드렸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이례적으로 격노한 것은 자신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 관계'인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정치보복'까지 거론한 데 대해 '선을 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전날 기자회견에서 노 전 대통령의 죽음과 정치보복을 나란히 언급하자 9년 전 이 전 대통령으로부터 지키지 못하고 30년 지기를 떠나보냈다는 가슴 속 한(恨)과 부채의식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분노로 표출될 수밖에 없던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이날 "이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직접 거론하며 정치보복을 운운한 데 분노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사용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단어를 동원해 강도 높게 비난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이 전 대통령이 마치 청와대가 정치보복을 위해 검찰을 움직이는 것처럼 표현을 한 것은 우리 정부에 대한 모욕"이라며 "대한민국 대통령을 역임한 분으로서 말해서는 안 될 사법질서 부정이며 정치근간을 벗어나는 일"이라고도 했다.

문 대통령이 '분노', '모욕'이라는 직접적이고 강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취임 후 처음이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이 전 대통령에게 그런 말(노무현 죽음·정치보복)을 듣는 문 대통령 입장에서의 '분노'라는 말은 센 게 아니다"고 했다.

이처럼 격노한 이면에는 9년 전 노 전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하도록 만든 장본인이 거꾸로 '정치보복'을 입에 담는 것만큼은 참기 어렵다는 인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날 '노코멘트'로 일관하던 청와대 입장이 무색할 만큼 하루 사이에 직접 강도 높게 비난한 것에서 문 대통령의 감정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격한 반응이라 생각지 않는다.", "참을 만큼 참았다"는 청와대 핵심 관계자의 말은 곧 문 대통령의 의중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에서 9년 전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 후 검찰 수사가 본격화 하는 국면을 담은 챕터의 제목을 '정치보복의 먹구름'이라고 지었다. 노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한 2009년 4월30일은 '치욕의 날'이라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의 정치보복으로 노 전 대통령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인간 문재인'의 인식이 자서전 곳곳에 녹아 있다. 이런 가운데 이 전 대통령이 거꾸로 '정치보복'을 운운하자 인내심에 한계에 다다른 것이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대통령의 분노가 개인적인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라며 "대통령의 분노는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고 말했다. 전날 이 전 대통령의 표현을 그대로 돌려준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최근 역사 뒤집기와 보복정치로 대한민국의 근간이 흔들리는 데 대해 참담함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으로는 문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이 검찰수사를 받을 때 속으로 삼켰던 분노가 이날에서 터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문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노 대통령과 우리는 그 때 엄청나게 인내하면서 대응했다. 그 일을 겪고 보니 적절한 대응이었는지 후회가 많이 남는다. 너무 조심스럽게 대응한 게 아닌가하는 회한이 있다"고 적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국민이 불안해 할 이야기를 일방에선 계속 쏟아내고 있는데 정부 책임감만으로 언제까지 인내만 하고 있으란 말인가"라고 반문하면서 "그것은 또다른 무책임이다. 지금까지 인내 많이 해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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