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소희 기자]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 이 나라를 떠나야지 /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 괴물을 잡아야 하나"

최영미 시인의 '괴물'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미투 열풍으로 드러난 문화예술계 민낯은 추악했다. 이른바 거장으로 불렸던 이들은 한낱 '더러운 욕망' 그 자체였다.

문화 권력을 잡은 시인(고은) 연출가(이윤택 오태석), 배우 교수(조민기)는 '그 세계의 왕'으로 '종교 집단의 교주'처럼 군림했다.

◇'괴물' 어떻게 탄생했나?

존경받는 스승과 유명세 사이에서 어떻게 그럴수가 있었을까?

이들 괴물들은 당사자의 추악함과 함께 해당 분야의 폐쇄적인 문화와 삐뚤어진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이 문화예술계의 중론이다.

우선 연희단거리패처럼 밀양연극촌에서 일정 기간 합숙을 하며 이 예술감독이 전 감독이 좌지우지하는 연극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곳에서는 그의 명령은 곧 법전과 같았다.

폐쇄적인 환경에서 공동작업을 해야만 하는 연극계 환경에서 연출가 또는 예술감독은 전권을 쥐고 있다. 이곳에 매달려 생계까지 꾸려야 하는 막내 여성 단원들이 그동안 성추행을 당했음에도 '입조심'이라는 명목으로 쉬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성추행 의혹에 휩싸인 오태석 극단 목화 레퍼토리 컴퍼니 대표 역시 권력의 공고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 대표는 물론 극단 목화 단원들은 공식적인 입장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한결같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외부와는 소통하지 않는, 그들만의 견고한 세계가 있는 것이라고 연극계 관계자는 말했다.

고은, 이윤택, 오태석에 비해 문화예술계에서 명망이 떨어지는 조민기도 본인의 세계에서는 왕이었다.

송하늘은 조민기에 대해 "예술대학에서 배우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조민기 교수는 절대적인 권력이었고 큰 벽이었기에 그 누구도 항의하거나 고발하지 못했다. 연예인이자 성공한 배우인 그 사람은 예술대 캠퍼스의 왕이었으니까"라고 적었다.

◇그간 괴물을 왜 못 잡았나

문화예술계 내의 성추행 또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그간 속내를 털어놓지 못했던 이유는 가해자들이 권력을 이용해 보복을 하거나 2차 피해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최영미 시인은 최근 페이스북에 "권력을 쥔 남성 문인들의 이러저러한 요구를 거절했을 때. 오랜 시간에 걸쳐 '제외되는' 식으로 문단의 주변부로 밀려난다"면서 "그들에게 희롱당하고 싶지 않아 문단 모임을 멀리하고 술자리에 나가지 않으면, 더 큰 불이익을 당한다"고 썼다.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과 '위드유'(#With You·당신과 함께 하겠다) 운동으로 인한 연대에 힘 입어 이런 불이익을 당한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면서, 괴물을 만드는데 방조한 이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 역시 높아지고 있다.

송하늘은 "조민기 교수를 배웅하려 죽 서있는데 인사를 하던 중 저에게 다가와 얼굴을 붙잡고 입술에 뽀뽀를 했다"면서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폭로했다.

문화예술계 관계자는 방관자들의 태도에 대해 "자신의 성공을 위해 권력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라면서 "그들 역시 무력감을 느꼈을 테지만, 괴물을 만들어낸 공범"이라고 말했다.

이윤택 전 감독이 제왕적 권력을 쥔 연희단거리패에서 방관자적인 태도는 더욱 강했다.

2008년부터 연희단거리패에서 활동해 온 배우 겸 연출인 오동식이 2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나는 나의 스승을 고발한다"면서 연희단거리패에서 성추행·성폭력 사건을 무마시키려고 했던 정황을 공개했으나 상당수가 그를 지지하는 대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유다.

이 전 감독 왕국의 일원이자 방관자였던 장본인이 뒤늦게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비판이다.

특히 오동식의 글에 '한 1년 전 익명으로 이 전 감독의 성추행을 폭로했으나 결국 글을 내렸던' 피해자로 등장한 이는, 이날 오동식이 쓴 글에 댓글을 통해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나 역시 들었던, 오빠가 저지른 잘못들에 대해서도 언젠가 털어놓고 그들에게 사과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흔적 지워지고 수모 당하는 추락한 괴물들

추락한 괴물들은 곳곳에서 흔적이 지워지는 동시에 정부의 지원에서도 배제될 위기에 몰렸다. 밀양시는 이윤택 전 감독이 운영해 온 밀양연극촌에 대해 최근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이 전 감독 모교 앞에 새겨졌던 그의 동판 역시 철거됐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고은 시인의 시가 퇴출당할 지도 관심이다. 교육부는 21일 "향후 발행사 혹은 저작자의 수정·보완 요청이 있는 경우 교과서 상시 수정·보완 시스템을 통해 관련 내용을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울도서관에 있는 '만인의 방' 철거 문제도 현안으로 떠올랐다. 고은 시인이 '만인보'를 집필했던 안성 서재를 재현해 지난해 11월 개방한 곳이다.

이윤택 전 감독이 이끈 밀양연극촌의 촌장이었던 하용부에 대해 문화재청은 지원금 지급을 중단했다. 성추행 의혹이 사실로 확인돼 법적 조치가 이뤄질 경우 지원금 환수 등의 필요한 행정조치도 취할 예정이다. 한국관광공사는 하용부를 문화여행 지역 명사 명단에서 제외했다.

오태석 대표가 이끄는 극단 목화 레퍼토리 컴퍼니는 내달 15일부터 25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신작 '모래시계'를 공연할 예정인데, 이 역시 취소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의 '창작산실' 선정작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공연하기 때문이다. 공연계는 물론 일반 대중 사이에서 오 대표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문예위의 고민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문예위는 "이날 대책회의를 하고 있다. 23일 다시 한번 회의를 통해 이번 건에 대해 입장을 밝힐 계획"이라고 밝혔다. 오 연출에 대한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이미 지원한 수천만원의 제작지원금을 회수하는 방안도 고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도종환)는 문화예술계 성추문의 파장이 커지자 적극 대응에 나서고 있다. 작년 진행한 문학·미술 분야와 영화계를 대상으로 한 시범 실태조사의 결과 등을 바탕으로 주요 분야별 신고·상담 지원센터를 운영한다.

영화계의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2018년 3월∼·영화인신문고에서 분리), 문화예술계의 예술인복지재단 내 신고·상담센터 운영(2018년 3월∼), 대중문화계의 콘텐츠진흥원 공정상생센터(2018년 3월∼) 등이 신설된다. 아울러 문화예술, 영화계, 출판, 대중문화산업 및 체육 분야를 대상으로 실태 조사를 한다.

문체부 이영열 예술정책관은 "문화예술계 특성상 성폭력 등의 문제는 잘 드러나지 않는데 용기를 내신 분들로 인해 알려졌다"면서 "예술기관의 인사 등에 있어서 평판 조회 등 철저히 검증하는 과정을 진행하겠다. 시스템이 잘 갖춰진 여성가족부와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문화예술계 성희롱·성추행 예방·근절을 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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