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폭력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김홍배 기자]자신의 정무비서 등을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지난 28일 늦은 오후 구속에 대비해 인치돼 있던 서울 구로구 남부구치소에서 나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구속이 되든 안 되든 제가 다 잘못한 일이다.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 용서해달라"며 "제 불찰이고 제 잘못이다. 부끄럽다"라고 말했다.
 

앞서 서울서부지법 곽형섭 영장전담판사는 이날 "현재까지 수집된 증거 자료와 피의자가 수사에 임하는 태도 등 제반 사정에 비춰 피의자가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다거나 도주의 염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영장기각 사유를 밝혔다. 또 "지금 단계에서는 구속하는 것이 피의자의 방어권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설명했다.

안 전 지사에 대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된 것은 검찰의 위력행사에 관한 입증이 부족한 것으로 해석된다.

법원이 안 전 지사에게 영장을 기각한 사유는 현재까지 수집된 증거 자료와 수사에 임하는 태도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할 때 안 전 지사가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주할 염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지금 단계에서는 안 전 지사에 대한 신병 구속이 피의자의 방어권을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이유도 기각 사유로 곁들였다. 이는 인신보호를 위해 가급적 불구속 재판을 원칙으로 하는 법원의 방침과도 일치한다.

결과적으로 사건의 중대성 못지 않게 법리적으로 혐의를 다툴 여지가 높은 만큼 방어권 보장이 인신 구속보다 더 우선이라고 본 것이다. 만약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면 검찰이 낸 증거자료가 혐의 소명에 충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검찰이 안 전 지사의 구속영장에 적시한 혐의는 형법상 피감독자간음죄(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강제추행죄,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상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죄였다.

남녀 성인 간 성관계를 합의에 의한 '애정행위'로 볼 것인지, 혹은 폭력이나 협박이 없었더라도 '위력'을 행사한 간음인지를 판단하는 게 구속 여부를 가르는 관건이었다.

피감독자간음죄는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경우에 해당한다.

여러 판례에서 위력은 폭행이나 협박과는 달리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인정됐다. 실질적인 폭행, 협박이 없어도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 지위나 신분이 높아서 위압감을 느꼈다고 하면 받아들여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영장이 기각됐다는 건 검찰이 안 전 지사의 간음과 위력행사 간에 결정적인 연결고리를 아직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위력이란 상대를 압도할 만큼 강력한 힘으로, 대법원 판례에는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유·무형의 세력을 의미한다고 명시돼 있다.

검찰 안팎에서는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 자체가 일종의 무리수라고 보는 시선도 많았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는 피해자가 아동·청소년, 장애인이 아니라면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경우가 드문 편이다. 일각에서 안 전 지사의 이번 구속영장 청구를 이례적이라는 반응과 함께 우려섞인 시선으로 바라본 것도 이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미성년자나 장애인이 아닌 이상 성인 남녀 간 위력으로 성관계 등의 성폭력이 이뤄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강제성이 있는 성폭력은 위력보다는 폭행이나 협박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강간죄나 강제추행죄 등으로 처벌하면 된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흔하게 발생하는 범죄가 아닌데다, 위력에 대한 정의나 범위가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만큼 위력 행사를 입증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물리적으로 보이는 증거가 필요한 강간과 달리 위력행사는 인멸할 만한 물적 증거 자체가 없다는 점에서 다른 재판에 비해 법리 다툼도 치열하다. 위력의 범위는 광범위한 편이지만 위력행사 입증 만큼은 법원에서 깐깐하게 다룬다.

위력에 의한 간음 여부는 위력의 내용과 정도, (위력)행위자의 지위나 권세의 종류, 피해자의 연령, 행위자와 피해자의 이전부터의 관계, 간음에 이르게 된 경위, 범행 당시의 정황 등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판단한다. 법원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깊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 전 지사에 대한 구속영장 심사에서는 도지사의 지위 또는 권세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했는지 여부 등이 중요한 판단 대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비서에게 성관계를 요구했을 당시 안 전 지사는 거대 정당의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이자 충남 지역에서 진보 인사로는 드물게 연임에 성공한 도지사였다.

도지사의 이러한 지위와 영향력은 성관계 거부 의사를 밝혔던 비서의 자유의사를 무력화하기에 충분한 '세력'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법원이 고심 끝에 영장을 기각한 건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던 데다, 안 전 지사의 지위나 입지에 따른 절대적인 영향력만으로는 위력행사를 통한 간음으로 곧바로 간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안 전 지사가 간음을 목적으로 비서 김지은씨에게 사회적·정치적 지위나 권세를 내세워 위력을 행사한 것으로 볼만한 증거나 정황이 부족하다는 것과 다름없다.

피해 여성이 구체적인 일시, 장소 등 성폭력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기억했던 점, 안 전 지사가 성관계 후 '미안하다' '괘념치 말거라' 등과 같은 글을 남겨 사과한 것도 위력행사의 근거로 볼만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피해자 측 주장을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안 전 지사와 김씨는 도지사와 비서 관계로 별도의 채용절차 없이 특채로 기용됐다. 안 전 지사는 김씨에게 인사권을 가진 '고용주'나 다름없다. 이런 막강한 권력을 가진 안 전 지사의 간음 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던 현실적인 한계를 김씨는 호소했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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