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정상회담을 일주일여 앞둔 18일 경기도 파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리모델링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김승혜 기자]경기도 파주시 진서면(津西面)의 군사분계선상에 있는 취락. '널빤지 다리 마을' 널문리라고도 부른 이곳이 판문점이다.. 8·15광복 이전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어룡리이다.

서울에서 통일로를 따라 북으로 약 50km, 개성 동쪽 10km 지점으로 북위 37° 57' 20″, 동경 126° 40' 40″에 있다. 6·25전쟁 전만 해도 지난날의 의주가도(義州街道)와 사천(砂川)내가 만나는 지점의 이름없는 한촌(寒村)으로 초가집 몇 채뿐이었으나 1951년 10월 25일 이곳에서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세계 뉴스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곳에서 조인되면서 이곳 명칭은 UN측과 북한측의 ‘공동경비구역(JSA)’으로 결정되었다. 같은 해 8월부터 9월 초까지의 포로교환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판문점 서쪽 사천내에 놓여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옛이름:널문다리)’ 부근에는 1976년 8월 18일 북한 경비군에 의한 도끼만행사건의 발단이 된 미루나무가 서 있었다.

현재, 공동경비구역 안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을 비롯하여 유엔측의 ‘자유의 집’ 등 10여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1971년 8월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1972년 7월 7·4공동성명 등으로 판문점은 6,000만 민족의 가슴을 한때 뜨겁게 한 바 있고, 1973년 6월 남북조절위원회가 결렬된 지 6년 반만인 1980년 8월부터는 남북총리회담의 실무회담이 이곳에서 열려 8차까지 거듭한 끝에 북한측의 일방적인 불참으로 공전(空轉)된 일도 내외의 관심을 모았다.

역사적인 '2018 남북정상회담'을 아흐레 앞둔 18일. 지금 이곳은 봄 기운이 완연하다.

판문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철조망과 관제탑 사이에 피어난 목련과 개나리였다. 불과 네달 전 오청성 귀순 사건으로 총격전이 이뤄지던 판문점에 봄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JSA에서 목격한 의외의 봄꽃에, 남북정상회담 일주일 여를 앞두고 기분이 묘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평화의집 주변의 조경 소나무와 잔디는 봄 기운에 더욱 푸릇푸릇했다.

정상회담장인 판문점 '평화의 집' 출입구에는 파란 가림막이 처져 있었다. 가림막 뒤로는 정상회담에 맞춰 건물 내부를 개수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처음 이곳에 발을 내디뎠을 때는 건물 주변으로 삼엄한 경비가 펼쳐져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간혹 작업 인부들만 2∼3명 정도 건물 내외부를 드나들 따름이었다. 불과 8일 뒤면 한반도의 명운을 건 담판이 이뤄질 곳이지만, 이날 외부에서 바라본 평화의 집은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청와대는 18일 내·외신 언론사 취재진 300여 명을 상대로 '판문점 프레스 투어'를 실시했다. 취재진이 접근 가능한 장소는 평화의 집 외부를 비롯해 '자유의 집' 내부, 통상 'T2'라고 불리는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등이었다.

▲ 남북정상회담을 일주일여 앞둔 18일 경기도 파주 판문점 외부를 기자들이 둘러보고 있다.
취재진의 관심이 집중된 곳은 역시 정상회담장인 평화의 집이었다. 애초 청와대는 평화의 집 내부도 공개한다는 방침을 세웠으나 리모델링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이날 내부 공개는 이뤄지지 않았다.

평화의 집 리모델링은 20일께 마무리될 예정이다. 정상회담장은 평화의 집 2층에 마련되며, 3층은 오·만찬이 가능한 연회장으로 꾸며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 평화의 집 1층에는 기자실과 소회의실 등이 있었으나, 이번 정상회담 때 판문점 현장 풀(POOL) 취재단이 이 기자실을 사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정면에 북한의 판문각이 있었고 자유의 집과 판문각 사이에 하늘색 건물 3채가 서 있었다. 건물 사이로 난 폭 5m가량의 좁은 길옆에는 한국군과 미군 병사 1명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이 하늘색 건물들이 바로 T1·T2·T3로 불리는 회담장 건물이다. T1은 중립국감독위원회 회담장, T2는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장, T3는 실무장교 회담장이다. 'T'는 '임시'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Temporary'의 약자다.

취재진을 안내한 김영규 유엔군사령부 공보관은 "처음 이 회담장을 설치할 때는 누구도 이렇게 오랫동안 사용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 '임시'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T1과 T2, T2와 T3 사이에 난 좁은 통로 한가운데는 MDL을 의미하는 연석들이 놓여있었다. MDL은 회담장 내부에도 존재하는데, 회담장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의 마이크 줄이 회담장 내 MDL의 역할을 한다.

현재로서는 회담장 사이로 난 통로 2개가 걸어서 MDL을 넘을 수 있는 판문점 내 유일한 통로다.

실제 이날 오전 북측 판문각에서 열린 2차 '의전·경호·보도' 실무회담에 참석한 우리 측 대표단은 T1과 T2 사이의 통로를 이용해 도보로 MDL을 넘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역시 걸어서 MDL을 넘어온다면 T1·T2 사이 통로나 T2·T3 사이 통로 중 한 곳을 이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통로를 지키고 서 있는 병사들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영화에서처럼 남과 북의 병사들이 서로 마주 보고 선 장면을 상상했는데, 통로 반대편에는 북한군 병사들이 서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평상시에는 남북 모두 통로 끝에서 경계근무를 서지 않고 카메라를 통해 서로를 감시한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북한군 하전사 오청성 씨가 판문점을 통해 귀순했을 때 그와 북한군의 움직임을 추적·촬영한 카메라들이 판문점 곳곳에 설치돼 있다는 것이다.

햇살이 뜨거웠지만 헌병들은 부동자세로 북측을 향해 삼엄한 경비 태세를 보였다.

애초 판문점이 있는 JSA는 이름 그대로 남과 북이 '공동경비'를 서던 곳이었다. 과거에는 우리 현병과 북한 경비병들이 같은 구역에서 경비를 서며 담배를 나눠피고, 양측 기자들이 JSA에서 어울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장교 2명이 숨지는 1976년 도끼 만행 사건으로 '공동경비'는 '분할경비'로 바뀐다.
 
JSA는 유엔사령부가 참여하는 말 그대로 공동경비구역이지만, 남측과 북측에는 분할 경비가 이뤄지는 아이러니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판문점이란 공간이 갖는 중립, 비무장지대 특성이 있었기에 남북관계가 얼어붙었던 시기에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런 대화 시도들이 켜켜이 쌓여져 2018년 남북정상회담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 공보관은 "지금 근무를 서고 있는 병사들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 나온 것"이라며 "북한군도 행사가 있거나 우리처럼 관광객이 오면 그들을 지키기 위해 경계근무를 선다"고 말했다.

영화에서처럼 남북의 병사들이 통로 반대편에 서서 대치하는 장면은 우연에 우연이 겹치지 않으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판문점, 그 이름의 고유 의미 그대로 널빤지 다리가 놓여졌던 조용한 시골 마을이 한반도 평화 다리가 되길 간절히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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