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리에 모인 1972 대표팀
만 달러와 연기처럼 사라진 천 달러

축구와의 인연은 대학시절로 끝나지 않았다. 나는 정치에 들어온 후 곧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맡게 되었다. 대학시절부터 형성된 인맥이 인연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당시 한국 축구팀의 단장을 맡아 두 번의 국제경기를 치루었다. 그런데 나는 그 두 번의 국제경기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두 번의 국제경기를 치루면서 내 생애 최고의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LA올림픽 아시아 최종 예선은 싱가폴에서 치러졌는데 사우디와 마지막 접전을 앞둔 상태였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아시아 축구에는 심판의 불공정 사례가 무척 많았고 바로 그것이 아시아 축구의 발전을 막고 있다는 지적들이 공공연한 비밀처럼 떠돌고 있을 때였다. 특히 우리가 현지에 도착해 보니, 앞서 있었던 쿠웨이트와 이라크 경기를 둘러싼 심판매수설을 싱가폴의 신문들이 공공연하게 게재하고 있었다.

더욱이 상대팀이었던 사우디는 부자나라였고 요리사까지 대동하고 오는가하면 왕세자가 직접 선수단을 이끌고 올 정도였다. 그랬으니 확인 할 길은 없지만 심판에게 엄청난 뇌물을 쓰리라는 게 거의 자명했던 것이다.

그런 저런 소식을 선수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때는 ‘붉은 악마’도 없었고 유일하게 응원단장식으로 쫒아온 사람이 당시 박종환 감독과 친구였던 이주일씨 뿐이었다.

박종환 감독은 물론 선수들의 사기는 있는대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심판자체가 이미 공정성이 보장이 안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 역시 암담해 하고 있는데 드디어 도저히 안되겠던지 박종환 감독이 내 방으로 찾아왔다.

“어떡하겠습니까, 이건 단장님이 좀 알아서 해 줘야 하겠습니다...실력만으로는 도저히 안된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고, 최소한의 공정성이라도 유지하려면...아무래도 그 쪽에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할 것 같습니다.”

오죽 다급했으면 그러랴 싶었지만 정말 우리로서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일단 박종환 감독을 내 보내놓고 나는 신중식씨와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현재 시사저널의 대표로 있는 신중식씨는 당시 축구협회 국제담당 이사로 원정팀에 함께 하고 있었다. 최순영 축구협회 회장은 당일 시합일에야 도착하기 때문에 어떻든지 우리들이 뭔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이 일을 대체 어떡했으면 좋겠소!”

“글쎄 말입니다. 일단 선수들과 감독을 안심시키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우리에게 돈도 없잖습니까!”

“일단 교민회 회장을 만나 좀 더 얘기를 해 봅시다.”

우리는 교민회 회장으로 있던 김현길씨를 만났다. 굉장한 축구팬으로 원정팀에게는 큰 도움을 주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달리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공정성이 보장이 안될 바에는 ‘불리한 조건’이라도 최대한 막아 대등하게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만 확인할 뿐이었다.

엄청난 갈등이 몰려왔다. 원칙과 도덕은 그만두고라도 한 사람의 정치인으로 차마 할 일이 못되었던 것이다. 감독과 선수들은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과연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결구 내가 먼저 십자가를 메는 수밖에 없었다.

“어떡하겠소. 자 이렇게 합시다. 일단 내가 각서를 쓸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만 달러만 구해 주시오, 그 다음에 다시 생각 해 봅시다.”

김현길씨는 나의 각서를 들고 나가더니 만 달러를 급전해 들고 왔다. 이제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이것을 과연 어떻게 전해 줄것인가. 우리에게는 큰 돈이지만 과연 이 돈으로 최소한의 공정성이 보장된다는 장담도 할 수 없지 않은가. 만에 하나 건네주다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 때는 또 어찌할 것인가! 그러나 일단 시도라도 해 봐야 할텐데... 돈 만 달러를 앞에 두고 얼마나 그러고 앉아있었을까. 갑자기 신중식씨가 일어서더니 ‘내가 해 보겠다’며 돈을 들고 나갔다.

정말 입이 바짝 바짝 마르는 순간이었다. 심판위원장을 찾아갔던 신중식씨는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리고는 ‘잘됐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경기에서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일단 감독을 불러 ‘성의 표시를 했다’며 안심을 시켰다. 이제 선수둘이 잘만 싸우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장춘몽이었다. 그 다음 날 아침 어찌된 일인지 심판위원장이 다시 오라해서 가보니 그 만 달러를 도로 주더라는 것이다. 받을 때는 아무 소리 없이 받더니 다시 돌려줬다는 건 상대방에게 더 큰 것이 왔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힐 일은 그렇게 받아온 돈을 열어보니 천 달라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어디에 가서 항의하고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든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우리 선수들이 어떻게나 잘하는지 10분 만에 롱슛이 터져 나왔다. 전 반이 끝날 무렵에는 2:0으로 스코어가 벌어졌다. 너무 잘 싸워준 것이다. 그런데 웬걸 전반이 끝나기 직전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는 골인데 사우디에 페널트 킥을 준 것이다. 누가 봐도 불공정이고 편파였다. 시쳇말로 먹어도 아주 단단히 먹은 것이다.

그러나 불공정 심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 선수들은 너무도 잘 싸워주었지만 결국 4:5로 패하고 만 것이다. 어느 누가 봐도 불공정 심판임이 자명했다. 우리로서는 아무리 억울해도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요즘에야 그런 일은 없을 터이니, 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라고나 할까. 아무튼 싱가폴에서의 경기는 부자 나라의 ‘돈의 위력’을 실감하며, 웃지 못 할 해프닝만을 남긴 채 끝을 내고 말았다.

메르데카 컵 스트립쇼

축구와의 인연 때문에 벌어진 나의 해프닝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또 한 번의 해프닝은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 컵 경기 때였다.

바로 내일 결승을 앞둔 저녁, 우리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난리가 났다.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 불이 난 것이다. 1층 주방에서 난 불이었다. 그 순간, 나는 불이고 뭐고 우선 당장 선수들 걱정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일이 시합인데 선수들이 잠을 설치면 끝장이었던 것이다.

‘화재 경보음을 막아야 한다!’

이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나는 옷을 입을 정신도 없이 당시 축구협회 이사였던 유현철씨와 있는대로 수건을 챙겨들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내의바람으로 둘이 밟거니 올라서거니 하면서 그 벨 소리를 막고 있었다. 더운 나라에서 잠자리에 옷을 챙겨 입었으면 얼마나 입었겠는가, 아무튼 그 차림으로 벨을 틀어쥐고 있었으니 누가 봤으면 그 모습이 어떠했을까.

그런데 일은 더 난감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벨 소리를 틀어막는다며 한 시간쯤 난리를 쳤을까, 불이 진화 되었다고 해서 우리 방에 들어가려 하니 그만 방문이 잠겨버린 것이다. 여권과 모든 짐은 물론 당장 몸을 가릴 옷 하나 없었다. 다행인 것은 화재로 호텔안의 모든 불이 나가버리는 바람에 사방이 캄캄했다는 점이다.

그 북새통을 떨고 지하실로 이동을 시키고 어쩌고 하면서 하룻밤을 보냈다. 드디어 시합 날 아침,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한마디 한다.

“불 나면 재수 좋다잖아요!”

순간, 그 말이 어쩌면 그렇게 하느님 말씀처럼 들리던지! 그 탓이었을까, 우리 선수들은 너무도 잘 싸워 주었고 결국 우리는 우승을 했다. 우승을 하고나니 지난 밤 호텔 안을 뛰어다니며 스트립쇼를 했던 것도 다 재미나게만 느껴졌다.

‘그래 우승할 수만 있다면 그런 스트립쇼 정도 백 번인들 못하랴!’

지금 생각하면 다 지나간 일이요, 웃지 못 할 해프닝이지만 그래도 나에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어버렸다. 축구인도 아니면서 축구와 맺어진 그 인연은 그 이후 나의 정치생활 내내 큰 재산이 되었다. <차범근 축구교실>이 내 지역구인 안산에 자리 잡은 것도, 그리고 <안산 국회의원배 축구대회>를 뿌리 내린 것도 다 그 인연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안산 국회의원배 축구대회가 열릴 때면 제일 먼저 쫒아와 안산 시민들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 주는 김정남 감독, 정강지 선수, 차범근 감독...모두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문화적으로 많이 소외된 안산의 청소년들에게 그들은 너무나도 큰 선물을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학사촌’을 아시나요?

나의 대학생활을 말할 때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학사촌’이다. 학사촌은 내가 이 땅에 건설하고자 했던 ‘이상향’이었다고 할까. 비록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그것은 나의 젊은 시절, 나의 이상과 꿈이 오롯이 담긴 하나의 실험이고 모험이었다.

내가 대학을 들어간 해가 61년. 4.19혁명의 열기는 다시 5.16에 의해 된서리를 맞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학생들의 잠재된 힘은, 박정희 대통령이 62년 한일회담을 본격적으로 거론하고 나오면서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주지하듯이 한일회담은 단순히 한일간의 현안문제가 아니라, 한ㆍ미ㆍ일의 관계였다. 6.25전쟁의 특수 경기로 경제부흥을 기적적으로 이룩한 일본과 한국을 경제적으로 블록화 시킬 뿐 아니라 정치 군사적으로 보루화 시킨다는 더 큰 이유가 존재했다.

당시 미국은 한일국교 정상화에 장애가 된 이승만 정권을 퇴진시키고 1961년 6월에는 케네디-지전(池田)회담을 워싱턴에서 개최하면서 한일회담을 공식 거론하고, 같은 해 11월에는 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의장을 워싱턴으로 불러 박정희-케네디 회담을 개최하기에 이른다. 이 회담에서 미국은 한일회담의 타결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리하여 박정권은 한일회담 개최를 시사하기 시작했으며, 1962년 말에는 김종필-오히라(大平正芳) 비밀각서를 통하여 대체적인 윤곽을 마무리 지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내가 대학 2학년 때인 1962년, 고려대생과 서울대생들은 미국의 한국여성 린치사건을 계기로 한미행정협정을 촉구하기에 이른다.

1963년 3월에는 자유수호 궐기대회를 열어 군정연장 반대를 부르짖었으며, 1964년에는 대일굴욕외교 반대 투쟁위를 결성하고, 마침내 전국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게 되었다.

바로 이 과정에서 그 유병한‘6.3사태’가 발생했다. 6.3사태는<대일 굴욕외교 반대 투쟁위>가 64년 3월22일 고려대생과 서울대생 3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첫 집회를 갖는 것에서 비롯된다. 시위는 계속 연이어졌고 마침내 6월3일 밤 9시 50분경을 기해 정부는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4.19세대’와 함께 ‘6.3세대’라는 말의 배경이 되었던 이 6.3사태는 바로 이러한 전 과정을 가르키고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바로 나의 대학생활이 있었다.

솔직히 나는 정치적인 이슈보다는 대학의 낭만과 멋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나 대학 전체에 휘몰아쳐 오는 바람 속에서 나의 옷자락인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일련의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자연스럽게 끼어들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는 주로 정외과의 친구들과 함께 했다.

5년 전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김정삼, 유도선수였던 김무환, 샘터 사장을 하고 있는 박조일, 그리고 지금 함께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이규정 의원 등이 그 때 함께 했던 친구들이다. 집회가 있을 때마다 참 열심히도 돌아다니고, 틈만 나면 모여 앉아 정부 비판에 날 새는 줄을 몰랐다.

그러면서 탄생된 것이 ‘학사촌’이다. 4학년 들어서면서 우리는 일련의 활동을 통해 나름대로의 정치적 안목을 기르게 되었는데 그 때 우리가 내린 결론이 ‘뭔가 체계적인 대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규정 의원과 김수길, 그리고 내가 핵심멤버였다.

우리는 먼저 지속적이고 합법적인 언론 매체를 갖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학>이라는 이름의 홍보물을 만들어냈다. 그리곤 바로 ‘재단법인 동학’을 만들었다. 명동 한복판에 있던 빵집 태극당의 4층을 세 얻어 사무실도 차렸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재정적인 기반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학사촌’이었다.

당시 시흥에는 우리 집 땅이었던 야산이 있었는데 우선 나는 부모님을 설득 해 그 야산을 ‘접수’했다. 그리고는 텐트를 치고 그 땅을 개간해가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을 자원봉사자로 쓰면서 완전히 우리 힘으로 개간을 시작한 것인데, 장차 과수원과 목장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학사촌 안에 학사주점을 만들어 젊은이들의 토론장을 만들어 젊은이들의 토론장을 만들자는 목표도 세웠다.

우리는 거의 수업도 때려 치고 야산을 개간하는 일에 몰두했다. 텐트에서 자고 먹고 하는 생활이었다. 홍보하는데 도움이 되겠다싶어 김정남 감독과 정강지 선수를 끌어들이기도 했는데 그 착한 친구들은 내가 부르면 언제든지 기꺼이 달려와 얼굴을 ‘팔아’주곤 했다.

그 덕분인지 ‘학사촌’은 당시 언론으로부터 꽤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아주 독특한 형태의 학생운동으로,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운동으로 주목을 받은 것이다. 기억나는 것은 <주간한국>에 우리가 특집으로 다뤄졌던 것인데, 가끔씩 그 때의 기사를 다시 한 번 찾아보고 싶지만 아직 짬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일 년을 ‘노동’했다. 그러나 졸업과 함께 나는 군에 가야만 했다. ROTC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규정 의원에게 맡기고 나는 군으로 갔다. 그런데 군에서 2년 반만에 나와 보니 빈 일터만 남아 있었다. 하다하다 결구 이규정 의원마저 두 손을 들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이상향은 좌절되었다. 나에게는 최초로 구체화된 꿈이었고, 또 최초로 맛본 좌절이었다. 그러나 학사촌은 실로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남겼다. 하나의 꿈을 실현시켜 나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한지도 그 때 배웠다. 그리고 비록 실패했을망정 그것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젊은 날의 모험이요 실험이었기에, 나에겐 더없이 소중한 재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5/19)

GP에서의 하룻밤

가끔 생각해 보면 스스로 원망스럽기도 하다. 뭔가 한 번 하기 시작하면 아예 만사를 제쳐두고 그 일에 푹 빠져버리는 내 성격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내 성격이다. 아무리 ROTC로 장교였다고는 하지만 내 또래의 젊은이가 군대생활을 좋아할 리는 없다. 그런데 나는 그 군대생활에 또 푹 빠져들어 갔다. 재미라면 우습지만 아무튼 군인으로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한 때는 아예 흔히 말하는 '말뚝'을 박을 생각도 했다. 내가 그렇게 군 생활에 큰 매력을 느낀 데에는 한 사람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와 전방의 GP초소에서 보냈던 하룻밤이 나에게 열어 준 세상은 실로 큰 것이었다.

갈수록 태산이네 그려!

내가 ROTC로 육군 소위가 되어 군에 입대한 것은 65년. 육군 보병학교에서 훈련을 마친 뒤 청량리에 집결 해 트럭을 타고 부대를 향해 떠났다. 당시로서는 내가 어디에 어떤 부대로 배속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는 것이라고는 1234하는 식의 숫자로 표시된 단대호만 알고 있을 뿐, 그 부대가 몇 사단인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전방일 거라는 예측만 할 뿐이었다.

트럭은 계속 북으로 향했다. '이동'이 지나고 '일동'이 지나고...갈수록 산은 깊어져 가고 있었다. 사람들을 하나 둘 씩 떨구어 가며 트럭은 계속 험한 길로 달려가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내리도록 좀체로 내리라는 명령은 떨어지지가 않았다. 남은 것은 나와 몇 사람 뿐이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말 그대로 갈수록 심산, 아니 갈수록 '태산'이었다. 갈수록 산이 깊어져 가는 것이다. 드디어 강원도 철원군 신수리. 일명 백골부대로 유명한 보병 제 3사단에서 마침내 나에게 내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맨 처음 사단장 앞에서 신고를 했다. 당시만 해도 사단장에게는 '각하!'라는 호칭이 쓰이고 있었고, 연단에 선 별을 단 사단장의 모습은 하늘처럼 보였다. '사단장 각하의 훈시'를 듣고 나니 다시 연대로 보내졌다. 다시 연대장의 훈시가 이어졌다. 그리고는 다시 대대로 가 대대장의 훈시를 듣고, 다시 중대로 가 드디어 한 식구가 되는 중대원을 만날 수 있었다.

거의 하루 종일 신고와 훈시로 이어지는 셈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한 계단식 내려갈 때마다 나를 대하는 대우가 달라지는 것이다. 중대쯤 내려올 때가 되니까 병사들이 앞다투어 나의 관물빽을 받아들고 길 안내까지 해 주는 것이다. 온통 낯설고 불안하기만 한 마음이 그제서야 조금 누그러지지 시작했다.

내가 간 부대는 최전방, 흔히 우리가 보는 비무장지대 철조망 바로 그 아래였다. 일반부대로는 최일선의 소대에 배치된 것이다. 그러나 소대장 생활 3개월만에 나는 현리에 있었던 후방부대인 6사단으로 전출이 되었다. '야,에제 후방이다!' 기쁨의 비명을 질러보는 것도 잠시, 그 6사단이 내가 있었던 3사단의 바로 좌측 사단이 될 줄을 어찌 꿈엔들 생각했으랴.

당시에는 전 후방 부대간에 서로 교류가 있던 시절이었다. 결국 내가 후방이라며 좋아했던 6사단은 전방부대와 교체기를 앞두고 전방 경험이 있던 나를 불러왔던 것이다. 나는 사단 이동 훈련까지 하면서 사단 수색 소대장으로 명을 받고 다시 전방부대로 되돌아 왔다.

그런데 이번에 돌아온 전방은 전방중에서도 최일선, 그것도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이른바 GP초소였으니...GP는 군사분계선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최일선의 초소를 가르킨다. 정전협정 당시 남북 군 공히 군사분계선 안에 초소를 두고 중립국 감시 통제하에 둔다는 협상에 따라 설치된 초소였다. 때문에 이 곳에 근후하는 군인은 '민정경찰'로 따로 부르기도 한다.

서부전선부터 동부전선 끝까지 군사분계선을 따라 501 GP,502 GP...식으로 초소가 있는 것인데, 군사분계선 북쪽의 북한군 동향을 살피는 일상 업무와 함께, 만약 전쟁이 나면 전쟁을 조금이라도 더 지연시키는 역할이 주 임무이고 그만큼 가장 먼저 죽게 되는 부대인 셈이다.

나는 또 하필이면 그 GP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503 GP에 배속이 되었다. 지도를 펴고 GP초소를 따라 쭉 선을 긋다보면 철원평야 군사분계선 중에서 가장 앞쪽으로 돌출된 곳이고, 또 평지에 '오똑'하니 노출되어 있다보니 방어진지 역할로는 취약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철원평야 일대에서 가장 위험한 초소였다. 북의 GP와는 불과 10분 15분 거리밖에 안되었으며 밤중에는 큰 소리를 치면 상대방의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그 때부터 '먹고 자고 지키기'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GP부대는 특별히 훈련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역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먹고 자고 지키는 것이 일상인 것이다. 특히 당시는 월남 파병이 시작된 시기였고, 동부전선에서 충돌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남북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때여서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설령 그런 시기가 아니라 해도 GP 생활이란 거의 고도에 사는 것과 같다. 바라봤자 벌판밖에 보이지 않고, 막사 밖은 바로 경계지역이니 막사 안이 유일한 생활 공간이자 놀이터인 것이다. 겨우 한다는 것이 일주일에 한 번씩 GP 바로 후방에는 또 COP초소가 있는데, 그 곳에 내려와 배구시합을 하는 정도였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내가 배속된 지 꼭 1달만의 일이었다.

허일병의 자살로 마감된 그 날의 사건

마침 나는 중대본부에 볼 일이 있어 GP초소에서 나와 있을 때였다. 나는 나온 김에 오랜만에 중대장과 마주앉아 바둑을 한판 두고 있었다. 김봉규 중대장은 육사 15기로 권정달 의원과 동기생이었다. 정치와는 무관한 사람이었고 월남에서 태권도를 교육시키기도 했으며 군 내에서는 장래가 촉망되는 아주 멋쟁이였다.

막 저녁 어둠이 짙어질 무렵이었다. 갑자기 방으로 중대본부 인사계의 주임상사가 뛰어오더니 '주 주...중대장님!'하면서 말을 더듬는 게 아닌가!

"이 사람아! 뭐가 그리 급해!"

그 때까지도 김봉규 중대장은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수럽잖게 말했다.

"사람이..사람이...죽었습니다!"

"뭐야? 무슨 소리야 !'

"깔려..깔려 죽었습니다."

나와 중대장은 채 신발을 제대로 신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튀어 나갔다.

후방 부대의 마지막 검문소를 막 지난 지점에 접어 든 순간, 차마 말로는 다 표현하기 힘든 참혹한 모습이 펼쳐져 있었으니...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여름이 되면 숲이 우거져 전방 초소의 시계(視界)가 막힌다. 그러면 후방부대원들이 이른바 '시계 청소'라는 걸 나오는데 그 날도 1개 소대가 시계 청소를 해 주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편 사단 수색중대의 박중사와, 운전병이었던 허일병은 후방에서 부식을 싣고 오던 중이었는데 바로 사건현장에서 그 부대와 맞닥뜨린 것이다.

문제는 검문소 이후부터는 야간에도 라이트를 결 수 없었다는데 있었다. 게다가 이미 어둠이 짙어질 무렵이니 아마도 허일병은 속도를 내서 돌아오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 빛은 시계청소를 마치고 부대원을 이끌고 돌아가던 소대장의 촐모에 붙어 있는 바로 하얀 야광이었다.

순간 허일병은 '사람이구나!' 싶어 운전대를 틀었다. 그러나 바로 그 반대쪽으로 소대원들이 줄을 맞춰 오고 있었으니...게다가 그 큰 트럭에 짐까지 가득 실려 있었으니,,,아무리 사고라지만 정말 말도 안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였다.

나는 전쟁 때에도 그런 참혹함을 보지 못했다. 모두 열두 명이 깔린 것이었다는데, 얼핏 보아도 4,5명은 이미 사망한 것 같았다. 그들 중 온전한 시신은 하나도 없었다. 온 몸에 피를 철벅으로 묻혀가며 시신들을 묶고 부상병들을 옮겼다.

그러고 나서 둘러보니 겁에 질린 박중사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허일병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최전방 소속의 차량에는 항상 운전대 옆에 장전된 총을 두는데, 그만 그 총을 빼들고 논으로 달려가 자살해 버린 것이다.

그 날의 충격으로 나 또한 멍해 있는 상태인데, 또 하필이면 내가 혀일병의 장례수습을 맡아야 했다. 작은 아버님이 올라오셨는데 ‘시신이 가면 복잡해지니까 화장을 하자’고 건의해 왔다. 그래서 벽제 화장터까지 와서 화장을 한 후, 다시 허일병의 고향인 경남 함안까지 내려갔다. 새벽 5시에 부대를 떠난 이후 함안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경.

정작 어려움은 그 다음이었다. 사건의 경위야 어떻든 아들의 유골을 들고 오는 사람에게 모든 원망이 다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참 난감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작은 아버님이 나서서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겨우 사람들이 진정되자, 나는 허일병의 부모님 앞에 가서 큰 절을 드렸다. 그리곤 아주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렸다.

“저희들이 아드님을 지키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허일병은 책임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용기를 보인 훌륭한 군인이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군인을 마지막까지 지켜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허일병의 부모님은 내 손을 붙들고 다시 한 번 참척(慘慽)의 고통에 몸을 가누질 못하셨다. 참으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었다. 아무리 사고라지만 그토록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당하고 나면, 정말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 것인지 나도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그렇게 허일변의 자살로 그 날의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날의 사건으로 내 인생의 소중한 스승 한 분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 또한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해야 할지 다마호사(多魔好事)라고 해야 할지.

<다음호부터는 본격적인 장경우 전의원의 정치이야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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