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소희 기자] 스튜디오 촬영을 빌미로 한 성폭력 피해 '#미투(Me too·)'가 잇따르는 가운데서도 남몰래 속앓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미투운동의 '사각지대'. 한국 내 외국인들이다.

30대 태국인 여성 A 씨는 지난해 겨울 충북 청주의 한 음식점에서 일을 하면서 각종 성추문을 당했던 경험을 동아일보를 통해 밝혔다. A씨가 근무를 시작한 첫날, 40대 남성 사장은 손님이 모두 나가고 다른 직원 2명도 자리를 비운 늦은 밤 ‘주방 일을 가르쳐 주겠다’며 손과 어깨를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A 씨는 서툰 한국어로 “싫어요”라고 분명하게 거절한 뒤 식당 옆 컨테이너 숙소로 뛰어 올라갔다.

숙소에 들어가 잠자리에 들고 약 1시간이 지났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식당에서 자신을 성추행 하려던 사장이었다. “슬립 위드 미(나랑 잘래)?”라는 사장의 말에 A씨는 “노(아뇨)!” 라며 다시 거절했다. A씨는 브로커 소개료로 쓴 돈과 받지 못했던 일당이 아까웠으나, 더 이상 이 곳에서 근무할 수 없어 조용히 짐을 싼 뒤 태국인이 운영하는 콜택시를 불러 타고 그 동네를 빠져나왔다.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2년 전 한국에 오자마자 취업한 경기 파주의 한 공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50대 남자 사장은 걸핏하면 엉덩이를 툭툭 쳤다. 일을 가르쳐 준다며 가까이 다가와 볼에다 얼굴을 비비기도 했다. 모멸감을 느꼈지만 ‘이런 게 한국 문화인가’ 하고 참아 넘겼다.

하지만 사장의 추행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했다. 함께 일하던 한국 여성 직원들 사이에서 “하지 마”란 고성이 터져 나오는 걸 보고서야 자신이 성추행을 당했음을 깨달았다.

A씨처럼 이주여성의 경우 성추행을 당해도 이를 호소할 곳이 마땅치 않다

사각지대는 또 있었다. 바로 유흥업소에서 일하다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들이다. 이들은 피해 사실을 알릴 경우 되레 자신이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해한다.

김은주씨(가명·21·여)는 지난 2월 서울 강남구 한 가라오케 바에서 일하다 성폭행을 당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겐 털어놓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20일 뉴스1에 "일반적인 상황에서 그런 일을 당했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인터넷에 실명으로 글이라도 쓰고 싶었다"며 "미투 운동을 보며 오히려 답답해지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김씨는 사기를 당해 진 빚 4000만원을 감당하지 못해 유흥업 일을 시작했다. 일을 시작한 지 6개월쯤 됐을 때, 김씨는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술을 많이 마신 뒤 정신 차렸을 땐 이미 자신이 옆방에서 성폭행을 당했단 걸 깨달았단다. 부인하는 가해자와 실랑이 끝에 당일 현장에서 경찰에 사건을 신고했다.

경찰의 연락을 기다리는 약 두 달간 김씨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참고인들이 김씨에게 일부 불리한 진술을 했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가해자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을까 걱정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김씨는 "가해자에게 신고하겠다고 따지면서 저도 모르게 사후피임약 값 5만원을 내놓으라고 했는데 그걸 제가 합의금을 요구한 것처럼 얘기한 것 같다"며 "도대체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5만원을 받고 성매매를 하겠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는 "제가 일했던 곳은 2차 성매매를 하지 않는 합법 업소였고 수백만원을 주겠다며 회유하는 손님들도 있었지만 저는 한 번도 응한 적 없다"며 "저도 다른 성폭행 피해자처럼 똑같이 힘들다"고 호소했다.

유흥업소는 성폭력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장소 중 하나다. 대검찰청의 '2017범죄분석'에 따르면 2016년 수사기관에 신고된 성폭력 사건 중 8%는 유흥접객업소에서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통계에 드러나지 않은 성폭력 범죄 건수도 많으리라 예상한다.

배복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는 드러나지 않은 통계에 대해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은 성 관련 서비스 제공에 동의한 것인데 무슨 성폭력이냐'는 식의 사회적 인식에 피해자들이 신고를 하지 않고 넘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배 대표는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하거나 실제로 2차 피해를 겪었다는 상담자들이 꽤 있다"며 "유흥업소는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가능성이 높은 장소여서 자신의 정보가 노출되거나 무고죄로 고소당할 가능성에 대한 불안도 크다"고 말했다.

실제 가수 겸 배우 박유천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허위 고소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던 송모씨는 '합의 하에 성관계를 해놓고 허위로 성폭행을 주장하는 꽃뱀이 아니냐' '성을 매개로 돈을 버는 일을 선택했으니 자업자득이 아니냐' 등 갖은 편견에 시달렸다.

송씨는 지난해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유흥업소 종업원의 말을 누가 믿어줄까 싶어 무능력하고 용기없는 저 자신이 너무 싫었다"며 "어떤 사람도 직업이나 신분에 따라 강간을 당해도 되거나, 신고할 경우 무고라 단정 짓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고 했다.

배 대표는 "유흥업에 종사한다고 해서 모든 상황에 동의했고 책임져야 한다는 시각은 개인의 인격권과 신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며 "유흥업소에서 일한다고 해서 성폭력 피해자의 지위를 박탈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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