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유세장에서 김종필과 이야기를 나누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JP의 삶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진=경향신문 캡쳐
[김민호 기자]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향년 92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김 전 총리는 이날 오전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진 것으로 전해졌다. 병원 측에 따르면 김 전 총리의 가족들은 이날 오전 119를 통해 그를 인근 순천향병원으로 옮겼다. 병원 도착 당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사인은 노환.

한국 근대 정치사를 이끌었다고 평가되는 이른바 ‘삼김(三金) 시대’가 김 전 총리의 별세로 이제 ‘역사’가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9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15년 서거했다. 이어 23일 김종필 전 총리까지 별세하면서 삼김 시대가 마무리됐다.

지난 2016년 경향신문은 김종필 전 총리에 대해 '변혁, 쿠데타 거쳐 모호함으로 맺다'고 했다.

매체에 따르면 2016년 3월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 김종필 전 총리(JP)는 약간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지난날의 악연도 깨끗이 잊어버리고 전부 용서하려 한다, 모두가 한 생애의 업보 아닌가”라면서 “이번에 출판된 증언록이 우리나라 현대사 연구에 작은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올해 만 구순을 맞는 노 정객은 비록 몸은 휠체어에 의존했지만, 안색이나 표정은 좋았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5·16쿠데타와 18년 장기집권, 정치적 이합집산, 그리고 민주화를 거쳐 신권위주의 시대를 맞는 우리 현대사는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JP는 그런 현대사에서 서른다섯에 쿠데타를 주동하고, 국회의원 9번과 국무총리를 두 번 하고, 정당을 만들어 한 시대를 풍미하기도 했다. 그는 현대사의 보물창고와 같은 존재다라고 평가했다.

그를 우리는 '한국 정치의 풍운아'라 불렀다.

학생시절 반항적 기질 보인 ‘금수저’

그러나 그는 “회고록을 쓰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회고록은 자신만의 얘기가 아니라 역사적 진실의 규명하고, 빈틈을 메우고, 풍부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외국의 사례를 보지 않더라도 역사에 대한 진실 고백은 후학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며 ‘마지막 봉사’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부인의 간병일기를 꼼꼼히 남기면서 정작 회고록을 남기지 않은 최규하 대통령보다 노태우·이명박 전 대통령이 훨씬 책임 있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회고록을 쓰지 않겠다던 김종필 전 총리가 회고록이 아닌, 증언록을 썼다. 회고록이면 어떻고, 증언록이면 또 어떤가. 주요 역사적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다. 그는 대권주자로도 꼽혀 완전히 ‘발가벗긴’ 정치인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의 증언록이 <중앙일보>에 연재될 때 많은 논란과 비평이 이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증언록은 두 권의 책으로 엮였지만 지면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김종필은 박정희와 운명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지만, 삶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시작한다. 박정희는 모친이 낙태하기 위해 간장을 먹고 섬돌에서 뛰어내릴 정도로 지독히 가난한, 요즘으로 치면 ‘흙수저’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김종필은 태생부터 달랐다. 할아버지 때부터 쌀 3000섬을 수확하는 충남의 갑부 집안이고, 아버지도 측량기사이면서 부여면장을 지낸 지역의 유지였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JP는 매우 ‘반항적’기질을 가졌다. 그는 증언록에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공주중 2년 선배인 양순직에 의하면 JP는 스트라이크(동맹휴학)를 주동했다.(양순직 회고록, ‘대의는 권력을 이긴다’, 신동아 2002년 5월호) 일제강점기 학생들의 동맹휴학은 항일투쟁의 일환이었다. 이 일로 JP는 공주경찰서에 끌려갔고, 면장이던 아버지가 싹싹 빌어 겨우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일본 주오(中央)대학 유학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그러나 JP는 일본에서도 또 ‘사고’를 쳤다. 일본인 선배가 ‘조센징 비하 발언’을 하자 선배를 때려눕힌 것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매우 철저한 항일의식을 가진 ‘투사’였다. 특히 대전사범 시절에는 교생실습 도중 일본인 교장과 맞붙어 싸우다 헌병대에 끌려가기도 했다.(<중앙일보>, 2015.4.8) 실습생이 교장과 교무실에서 멱살을 잡고 싸운 일은 보통의 반일 기질 아니면 상상하기 어렵다.

JP는 시골로 교사 발령이 나자 두 달 만에 그만두고 다시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했다. 당시 미 군정은 서울에 있는 몇몇 단과대를 통합해 큰 규모의 국립서울대학설립안(국대안)을 추진했다. 많은 학생과 교수들이 ‘학원의 관료화, 군정의 학원 간섭, 학원민주화 말살’ 등을 이유로 이 국대안에 반대했다. 반대시위는 동맹휴학으로 이어졌는데, 당시 북한의 소련군정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 허헌 위원장을 통해 이 동맹휴학을 사주했다. JP가 바로 이 동맹휴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증언이 많다. 그가 서울대를 그만두고, 13연대 사병으로 입대한 배경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변혁적 의식이 5·16쿠데타와 손잡아

그의 소년 시절은 일제에 대한 증오, 사회변혁 의지로 꽉 차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사병으로 입대했다가 가혹행위를 참지 못해 탈영한 일, 다시 육사를 나와 군대의 부패를 바로잡는 정군운동을 시도하다 예편된 일 모두 그런 ‘변혁적 기질’이 바탕이 됐다. 문제는 이러한 JP의 기질이 어떻게 형성됐느냐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증언록에서 중요한 이 대목을 세밀하게 적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은 “김종익(JP의 큰형)이 부여에서 공산주의 단체인 교련연맹(충남교육연맹) 위원장을 지난 바 있다”면서 “해방 후 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이 김종필의 집을 급습했는데, 김종익은 피신하고 그 소란 통에 김종필의 부친이 충격을 받아 뇌졸중으로 졸도, 그 후 사망한 사실이 있다”고 증언했다.(김형욱 증언, ‘혁명과 우상’)

5·16 직후 주한 미대사관에서 근무하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JP의 집안에 대해 본국(미국)에 자세히 보고했다. 이른바 ‘그레고리 헨더슨 문건’이다.

“김종필의 6형제 가운데 전부는 아니지만 몇 명은 1950년에 북한이 남침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6형제 가운데 김종식은 그의 걸출한 형제 김○○이 인정하듯이 살아 있다면(그럴 가능성이 있다) 북한에 있을 것이다. 김종필의 또 한 형제는 충청남도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죄로 동네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고 현재 고향마을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한 형제는 남로당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했지만 그 후 김종필이 그의 체포를 막았다고 한다. 김종필 형제가 남로당에 협력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살던 동네에서는 매우 잘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모든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온 원인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 좌익활동은 지식인들이 하는 항일운동의 한 분파였다. JP는 어려서부터 이러한 형제들의 의식과 활동을 보면서 체제를 바꾸는 변혁론자로 성장한 것이 아닐까. 이것은 JP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그가 운명적으로 남로당 출신의 박정희를 만난 일이나, 역시 남로당 출신으로 ‘대구 10·1 폭동’ 중 사망한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딸(박영옥)과 결혼한 일 모두는 이러한 JP의 성장 배경을 모르면 이해되지 않는다. 김형욱은 박정희보다 JP가 훨씬 좌익적이었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JP의 이러한 의식은 박정희를 만나 ‘5·16쿠데타’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5·16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미국이 제일 의심했던 부분이 바로 박정희·JP의 사상적 배경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증언록에서 “혁명공약 중 반공을 제1의 국시로 한다는 대목을 자신이 직접 넣었다”고 밝혔다. 이는 자신의 과거를 확실히 지우겠다는 선언이었다. 5·16 이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통일운동가 최백근 등 과거 비슷한 노선을 걸었던 혁신세력의 ‘변혁론자’까지 냉철하게 처단한 일은 자신이 과거와 확실히 결별했음을 입증하기 위한 조치였다.

대표적인 것이 황태성 사건이다. 황태성은 항일투쟁가로 해방 후 경상북도 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을 지내며 박정희의 형 박상희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박정희는 형 박상희보다 황태성을 더 좋아해 일종의 ‘인생의 멘토(조언자)’였다. 황태성은 분단 후 월북해 북한 무역성 부상(차관)을 지내다 5·16이 나자 ‘밀사’로 박정희를 만나겠다고 서울에 왔다. 이런 사실이 야당 측의 폭로로 드러나자 JP는 황태성을 ‘간첩’으로 몰아 신속히 사형에 처했다.

황태성 사건은 박정희가 자신의 사상적 혹은 정치적 위기를 탈피하기 위해 형의 친구이자 자신의 멘토를 죽인 상징적 사건으로 꼽힌다. JP는 증언록에서 여전히 황태성을 ‘간첩’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사건은 황태성이 간첩이든 아니든 자신의 결백 혹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선배나 멘토도 가차 없이 처단하는 잔인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후 JP의 역정은 짧게 나열만 해도 책 한 권이 넘을 정도로 방대하다. 중요한 대목만 해도 중앙정보부 4대 의혹사건, 공화당 창당, 한·일 국교정상화, 월남 파병, 3선 개헌, 많은 간첩조작 사건, 유신헌법 제정, 긴급조치 등 현대사의 주요 사건에 그는 옆에 있었다. 박정희 사후에도 그는 자민련 창당, 노태우와 3당 합당, 김대중과 DJP연대 등 숱한 정치현장에 직접 가담했다.

 
‘적과 동지’ 명확한 구분 없는 정치 역정

그 숱한 사건을 일일이 설명할 수 없지만 JP를 관통하는 핵심은 2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바로 ‘자의반 타의반’과 ‘영원한 2인자’이다. 1963년 2월 25일 중앙정보부장으로 민주공화당 창당작업 중 내부 반발로 외국으로 떠나면서 한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말은 평생 JP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압축한 단어가 됐다. 100% 자의로 행동하던 젊은 시절과 달라진 것이다.

1968년 자의에 의해 박정희를 넘보다 타의에 의해 정계를 은퇴한 일, 10·26 이후 자의에 의해 공화당 최고 책임자가 됐지만 타의(전두환·노태우)에 의해 좌절된 일, 1990년 3당 합당으로 권력의 한 축에 복귀했지만 다시 YS에게 토사구팽된 일, 다시 DJ(김대중)와 연대한 일 등 JP의 정치적 역정은 ‘자의와 타의의 반복’이었고, 그 합종연횡에서 그는 ‘2인자’에 만족해야 했다. 그는 증언록에서 노태우에게 조언했던 2인자론을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절대로 1인자를 넘겨보지 마라. 비굴할 정도는 안 되겠지만 품격을 유지하면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 둘째, 성의를 다하여 알관되게 1인자를 보좌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하라.… 때가 올 때까지 1인자를 잘 보좌해야 한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넘겨야 한다. 참는다는 것은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게 진정한 인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대단한 2인자론이 아닐 수 없다. 2인자의 인내는 1인자가 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JP는 1인자가 되지 못했다.

자의반 타의반이나, 영원한 2인자 등 JP의 수식어는 분명하고 명징한 용어가 아니다. 방대한 2권의 증언록을 남겼지만 여전히 그의 삶은 애매하며, 이중적이며, 심지어 모호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의 정치역정은 ‘적과 동지’에 대한 명확한 구분도 없다. 이는 한 번 안 보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안 보는 지조를 중시했던 우리 정치문화와 달랐다. JP가 정치를 허업(虛業)이라 정의한 것도 이런 배경일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달관한 듯한 태도는 JP의 예술적 재능과 합쳐져 ‘예술을 아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JP가 ‘자의반 타의반’ ‘2인자’로 일관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힘 없는 서민을 위함이었나, 불의가 없는 사회 정의를 위함이었나, 역사적 명분을 위함이었나. JP는 소싯적에 역사를 바꾸려는 풍운아였지만 자신의 출신을 죽이면서도 현실과 타협하며, 2인자에 만족하는 삶을 산 것은 아닐까. 물론 그것이 보통의 인생이긴 하지만 말이다.

출판기념회에서 JP는 마지막으로 “머지않아 육신마저 버리고 떠나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면서 “그동안 저의 부덕의 소치로 본의 아니게 상처를 드린 일이 있다면 용서해 달라”고 말했다. 그의 야망과 처신을 위해 희생된 많은 사람들에 대한 사죄의 표현으로는 좀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JP는 자신의 증언록을 남기는 것으로써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스스로의 표현대로 ‘서쪽 하늘의 벌건 태양’이 되고 싶던 JP는 ‘하얗게 타버린 재’가 됐다. 이젠 JP는 사가들에 의해 두고두고 평가받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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