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로호가 있는 강원도 화천 지역에서 미군에게 포로가 된 중공군의 모습. 대한민국 정부 기록 사진집
[김승혜 기자]6·25전쟁 당시 중공군 수만 명을 수장한 파로호 전투.

육군본부 군사연구소가 발간한 '지암리·파로호 전투'에 따르면 중공군의 춘계공세 때인 1951년 5월 24∼30일 화천 파로호 인근에서 국군과 미군에 의해 사살된 중공군 숫자는 2만4천141명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또 포로는 7천905명으로 기록돼 있다.

3만2천46명의 중공군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다고 전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미 제9군단 지휘보고서를 토대로 육군 군사연구소가 작성한 것이다.

26일 한-중 관련 단체는 6·25 전쟁의 또다른 희생자인 중국군의 유해를 발굴해 이제라도 중국으로 보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6·25 전쟁 때 북한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를 미국으로 송환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25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공개한 ‘미 제9군단 지휘보고서’를 보면, 1951년 5월24~30일 강원도 화천 파로호 인근에서 사살된 중국군은 2만4141명이다. 이들의 주검을 확인한 부대별로 보면, 한국군 6사단 1만3383명, 2사단 772명, 미군 7사단 6982명, 24사단 3004명 등이다. 하지만 2만4천여구의 중국군 주검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미 제9군단은 파로호 전투에 참가한 한·미 연합군을 지휘한 부대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중국군의 구체적인 숫자가 공식 기록을 통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한·미 군이 사살했다고 확인한 2만4141명의 중국군 가운데 대다수가 파로호에 수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군은 화천저수지 일대에서 포위돼 퇴로가 막혔다. 당시 한국군 장병들의 증언에 따르면, 어마어마한 숫자가 물에 빠졌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주변 마을에선 중국군 3만명이 파로호에 수장됐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왔다.

파로호에 설치된 ‘파로호 비석’에는 ‘중국군 제10·25·27군을 화천저수지에 수장시킨 대전과를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전선을 방문해 ‘파로호’라는 친필 휘호를 내렸다. 그 후 화천저수지를 파로호라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 파로호는 ‘오랑캐를 깨뜨린 호수’라는 뜻이다.

한-중 우호단체에서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수장된 중국군의 유해를 발굴·송환하고 위령탑을 세우는 등 중국군 전사자 추모 사업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허장환 한중국제우호연락평화촉진회 공동대표는 “남의 나라 전쟁에 보낸 남편과 아들의 생사도 모르는 중국군 가족들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비록 한때 적국이었지만, 이제라도 서로 쌓은 원한을 풀고 상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남한에서 발굴한 유해는 1만2천여구다. 이 가운데 중국군 유해는 589구(북한군 700여구)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모두 국군 유해다. 하지만 중국이 밝힌 당시 중국군 사망자는 11만6천여 명이며, 실종자와 포로 2만9천여 명을 더하면 모두 14만5천여 명이다.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사망한 중국군 유해는 2013년 12월 한-중 간 합의에 따라 지금까지 5차례에 걸쳐 589구가 송환됐다. 2014년 3월 처음으로 437구가 인도된 이래 2015년 3월(2차) 68구, 2016년 3월(3차) 36구, 2017년 3월(4차) 28구, 2018년 3월(5차) 20구가 송환됐다. 중국군 유해 송환은 2013년 6월 중국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제안해 추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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