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기자]23일 오전 9시35분쯤 서울 중구 신당동 N아파트. 이날 아파트 경비원 김모(70)씨는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러 나왔다. 김 씨는 여기서 출근길을 서두르는 주민 2명과 인사를 나누다가 갑자기 “쿵”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3~4호 라인 현관 보도블록 위에 중년 남성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 달려가 보니 불법 정치자금 의혹으로 특검 수사를 받던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였다. 그는 회색 와이셔츠, 검은색 정장바지, 운동화 차림이었고 안경은 쓰지 않고 있었다.

노 원내대표의 소식이 전해진 이후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비보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며 잠시 침묵했다. 그는 "귀국 전날 밤에 술 한잔 대접하면서 과거 노동운동을 회고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원내대표는 "방미 기간 중 드루킹 특검과 관련해 동료 대표들과 단 한번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본인도 그와 관련해 해명의 목소리를 단 한번도 내지 않았다"면서 "너무 가슴 아프고 비통한 일이다. 늘 노동운동 현장에서 소외되고 어려움에 처한 노동자들의 애환과 고충을 대변하고자 했던 그 진정성이 어떻게 비통한 죽음으로 끝났는지 말문을 잇지 못하겠다"며 심경을 전했다.

미국 일정에 동행했던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도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굉장히 큰 충격이다. 미국에서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면서 "토요일 1시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전날 금요일 저녁에 5명이 모여 맥주 2시간 정도 마셨다. 일정 다 마치고 자리를 했는데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김 원내대표는 방미 일정 중 해외 특파원들이 노 원내대표에게 드루킹 특검 관련해 질문을 한데 대해서는 노 원내대표가 상당히 불쾌해했다고도 전했다.

그는 "노 대표가 '이 자리는 방미 성과를 얘기하는 자리인데, 그 걸 직접 여러명 있는데서 얘기하는건 아닌 것 같고 별도로 따로 얘기하겠다'고 했다"면서 "그래서 간담회를 마치고 별도로 20분 정도 노회찬 대표만 따로 했다. 원내대표끼리는 그 문제에 관해 물어보지도 않았고 일절 서로 얘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없었느냐는 질문에는 김 원내대표는 "제가 미국 정계지도자와 경제인들을 만나 '느슨한 제재 완화와 일방적인 평화만 갖고 결코 비핵화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강한 입장을 제시했을때 예전처럼 강하게 반박하지 않았다"면서 "사적인 자리에서 둘 만의 이야기를 할 때에도 (노 원내대표가) 본인이 평양에 갔다온 얘기를 하면서 '북한이 쉽게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김 대표 얘기에 대체적으로 공감한다. 다만 대화의 끈은 놓아선 안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했다"고 전했다.

앞서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드루킹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전면 부인했었다. 노 의원은 지난 1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어떠한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며 “(특검이) 조사를 한다고 하니, 성실하고 당당하게 임해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드루킹이 운영한 경제적공진화모임(경공모)에서 강연을 한 데 대해 “(강연 당시) 제가 만난 분이 드루킹이라는 걸 이번에 알았다”며 “그 단체의 대표로는 알고 있었는데 필명으로 소개받지 않았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노 의원은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에 대해서도 “이쯤 되면 의심병 아닌가. 사람과 증거가 다 확보된 상황이니까 검찰의 지휘로 경찰이 수사하면 다 밝혀질 일”이라고도 했다.

그런 그가 죽음을 택했다. 그는 유서에서 ‘드루킹에게 금전을 받은 사실은 있으나 청탁과는 관련 없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노회찬은 누구?

노동운동가로 시작해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을 걸었던 노회찬 의원이 23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1956년생으로 올해 62세인 노 의원은 한국의 대표 진보 정치인으로 꼽힌다. 그는 부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고려대 재학 시절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으며, 특히 노동운동에 전념했다. 1993~2003년까지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으로 일했고,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창립에도 역할을 했다. 1989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구속돼 3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후 1997년 ‘국민승리21’ 기획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에 뛰어 들었다.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에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민노당 부대표를 지냈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노당 비례대표로 당선돼 처음 국회에 입성했다.

민노당이 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분당된 이후 2008년 심상정 대표 등과 함께 진보신당을 창당하고, 공동대표를 지냈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통합진보당 공천을 받아 서울 노원병에 출마해 당선됐으나 과거 ‘삼성 X파일’ 유죄 판결이 확정됨에 따라 의원직을 상실했다. 2016년 정의당 공천을 받아 경남 창원시 성산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현재 정의당 원내대표로 활동 중이었다.

 
지금 SNS는

진보개혁 성향의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3일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투신자살한 것과 관련해 “진보가 백옥같이 희고, 1급 청정수일 수만은 없다”며 “유혹을 받으면서도,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진보의 가치를 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노 의원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노회찬 의원은 한국 진보정치의 대들보 같은 존재였다"면서 "노회찬이 없는 진보정당은 상상하기 어렵고, 진보정치의 시간이 멈춰선 느낌"이라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갑작스런 노 의원의 사망 소식이 이날 알려지자 수많은 시민들이 SNS 등을 중심으로 안타까움과 함께 애도를 표시하고 있다. 일각에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88만원 세대’ 저자로 알려진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도 페이스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숨이 턱 막힌다”며 “너무 놀라서 애도할 방법을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많은 네티즌들은 노 의원의 사망에 안타까움과 애도를 표했다. 한 네티즌(아이디 dlaw****)은 “너무 안타깝다”며 “권력에 빌붙고 아부하는 사람은 더 큰 죄를 지어도 반성도 없이 잘 먹고 잘사는데 세상 참...”이라고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노 의원의 투신자살이 특검 등의 수사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며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디가 ‘dmad****’인 네티즌은 트위터에 “불법자금, 뇌물 처먹고 자살한 게 자랑이냐?”라며 “당당하면 수사 받으면 되는 걸 왜 자살해서 수사하는 사람 곤란하게 하느냐”고 비판했다.

정치인의 죽음

한편 노 원내대표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앞선 정치인들의 자살에 다시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고(故) 성완종 전 새누리당 의원 역시 이명박 정부 시절 자원 외교 비리 의혹과 관련한 수사를 받던 2015년 4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 전 의원은 숨지기 전 '성완종 리스트'로 정치권을 흔들어놓기도 했다.

고(故) 김종률 전 통합민주당 의원은 한 벤처기업의 부실 회계를 묵인하는 대가로 돈을 수수한 혐의로 경찰의 수사를 받다 한강에 투신해 숨졌다.

이 밖에 고(故)안상영 전 부산시장, 고(故)박태영 전 전남지사, 고(故)이준원 전 파주시장 등도 각종 의혹 사건으로 구속되거나 수사를 받는 와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치인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정치 보복'이라는 비판도 뒤따랐다. 대표적 사례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은 '박연차 게이트'로 검찰에 소환되는 등 곤욕을 치르다 2009년 투신, 서거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국민적 공분이 거세지면서 검찰은 당시 여당(한나라당)에서조차 '망신 주기 수사를 했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역시 정치 보복이라는 국민적 비판에 직면했다.

실제 이후 당시 수사를 지휘한 이인규 전 중앙수사부장은 노 전 대통령에게 정치적 타격을 준 '논두렁 시계' 사건은 당시 국가정보원이 언론 보도를 기획했던 것이라는 취지의 폭로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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