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충남 공주 왕촌리 학살 현장으로 끌려가는 재소자들. 영국 런던에서 발행한 <픽처 포스트>(Picture Post)에 ‘워 인 코리아’(War in Korea·1950년 7월29일)라는 제목의 기사에 담긴 사진이다.=한겨레 21 캡쳐
[김승혜 기자]남편이 처형된 후 오늘 처음 찾아 왔어."

지난 12일 충남 공주 왕촌리 작은살구쟁이 민간인집단암매장지 희생자 추모제에서 만난 임행리(86·전남 순천시 서면)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임씨는 1950년 당시를 생각하는 듯 한참을 침묵했다. 남편 장윤옥씨는 여순사건에 연루돼 1948년 어느 날 경찰에 끌려갔다. 결혼한 지 7년째 되던 해였다.

임씨는 "순천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찰이 와서 끌고 갔다"며 "아직도 농사 짓는 일밖에 모르던 남편이 왜 끌려 갔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임씨는 남편이 법정에서 3년 형을 선고 받은 것으로 기억했다. 임씨는 아들과 두 딸과 함께 충남 공주형무소에 수감된 남편이 출소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950년 전쟁이 터진 직후 여름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다. 남편과 공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막 출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손님이 전해준 것은 남편의 사망통지였다.

"남편이 군인들에게 끌려가기 직전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다고 하더라구. 지금 끌려가면 다시는 살아 돌아오기 어려우니 출소하거든 내 고향에 찾아가 군인들에게 끌려간 사실을 전해주라고…. 남편이 미리부터 죽으러 가는 길인 줄 알았나봐…."

이날 오후 2시 열린 왕촌 민간인집단 희생자 위령제에는 모두 100여 명이 참여했다고 오마이뉴스가 보도했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머리카락이 모두 짧게 잘렸고, 머리를 무릎에 붙인 채 숙이고 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얼굴을 들고 있는데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트럭 뒤쪽에 재소자들을 현장으로 끌고 가기 위해 경찰과 군인들이 소총을 들고 감시하고 있다. 왼쪽 군인은 오른발을 트럭에 걸쳐 재소자에게 총구를 겨냥한 채, 촬영자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동요나 주저함이 보이지 않고 희미한 웃음마저 보이는 듯하다.”

한겨레 21은 이 사람들은 공주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이었다. 1950년 7월, 공주형무소 재소자 중 정치범과 국민보도연맹 가입자가 충남 공주 왕촌리 말머리재로 끌려가 학살됐다. 이날 희생된 사람은 700~1천 명으로 알려졌다. 2001년 말머리재에선 탄피와 함께 일부 유골이 발굴됐는데 유골들은 30㎝도 채 안 되는 깊이에 묻혀 있었다고 전했다.

이어 매체는 전쟁 직후 이승만 정권은 전국 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과 보도연맹원을 대대적으로 처형했다. 정치범과 보도연맹원이 인민군에 협조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강한 척하는 사람들이 내면의 유약함을 감추듯, 국민의 지지가 허약했던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이 인민군에 협조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보도연맹원은 보호해야 할 국민이 아니라, 북에서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과 지하 ‘빨갱이’들에 부화뇌동할 잠재적인 ‘적’으로 인식됐다. 이 좌익세력은 공산주의자만을 지칭하지 않았다.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김구를 ‘크렘린의 신자’라고 비난한 것에서 잘 나타나듯,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를 모두 좌익세력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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