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중원 변호사
그러고 보니…… 파리가 그립다.

파리의 고약한 겨울 날씨가 생각난다. 찬비가 내리면 비에 젖은 우울한 거리에 낡은 도시의 온갖 서글픔이 난데없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파리의 뒷골목에 비가 내리고 하수구가 역류하며 악취가 허공으로 퍼져나간다. 남루한 차림의 알코올 중독자인 집시 노인이 비를 맞고 걸으면서 투덜댄다. “언제나 늙어가고 삶은 어느덧 지나가버리고 없네.”

파리의 우울.

보들레르가 말한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오, 더러운 도시여! 늙은 창녀에 취한 늙은 호색한처럼, 그 지독한 매력이 나를 끊임없이 젊게 해주는 이 거대한 갈보에 취하고 싶다.”

그래도 낭만적인 도시 분위기를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공부를 지독히 했던 그 시절의 소르본 대학 (……그때는 가끔 커피와 카페인을 엄청나게 마시면서 그 힘으로 일주일 동안이나 잠을 안자고 버티며 공부를 했다…… ), 압생트 또는 가짜 압생트인 페르노가 생각난다. 나는 그때 너무 가난했으니까 값이 싼 페르노를 훨씬 더 많이 마셨다. 그것들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파리 시절 값이 싼 그걸 참으로 많이 마셔댔지. 소르본 대학에서 중세 박물관을 왼편으로 돌아서 센 강의 좌안을 향해 걷다보면 나오는 생 미셀 거리의 먹자골목에 있는 터키 식당에서 주로 가짜 술을 마셨던 거야. 그것도 녹색을 띠고 있지만 물을 타서 희석시키면 금세 우윳빛으로 변하지. 맛은 감초 같고 기분은 한껏 고조되지만…… 역시 뒤끝이 안 좋은 게 흠인 거야.

압생트는 목구멍 아래로 털어 넣기 전에 음미하여야만 제 맛이 나지. 입 안 가득히 그걸 들이켜서는 마취된 듯한 몽롱한 기분 속에서 술이 혀끝을 감싸고도는 것을 느껴야만 하지. 그것은 입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오래 맛을 음미하다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겨서 속을 덥혀야 제 맛이 나는 거야. 그렇지, 압생트의 향기는 정말 죽여주지. 그걸 몇 잔 걸치면…… 간덩이가 부어 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져서 배 밖으로 튀어 나오지. 그게 환각 작용이 있어서 머리를 썩게 만든다고 하는데, 그 술에 대한 이유 없는 비방은 믿을게 못되는 거야.

다만, 그 마법의 술은 나에게 옛날에, 어린 시절에 일어났던 모든 것들을 차례차례 떠오르게 하지. 남쪽 바다, 잿빛 뻘밭, 벌교읍, 고향 마을, 아카시아 꽃, 제비, 참새, 갈매기, 철새, 똥개, 아버지와 동생, 어머니, 대합실, 톱밥 난로, 완행열차, 낙동강, 삼각주의 모래밭, 갈밭새, 대신동 등을.

그리고, 센 강이 생각난다. 그 강은 파리의 동남쪽 변두리에서부터 강폭이 넓어지고 눈썹 같은 원호를 그리며 도시를 가로질러 좌안과 우안으로 나누고 북쪽으로 흐른 다음 파리를 빠져나간다. 그러나 센 강은 파리 한복판에 있다. 파리의 심장이다.

센 강은 무슨 빛깔일까. 복잡한 색이다. 그 강은 주변의 모든 사물과 인간의 삶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강물은 새벽녘에는 잠깐 동안 소금처럼 흰색을 띄다가 벌써 검은색으로 변하고 마침내 초록색이 된다. 모네의 ‘그랑드자트 섬의 센 강 강둑’에서 강물은 분홍색과 흰색, 파란색이고, 마티스의 ‘퐁생 미셸’ 속 센 강은 빨강색이 어려 있다.

센 강은 흐른다.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가므로 한순간에도 같은 강물은 있을 수 없다. 흐르지 않은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다. 강물은 계절마다 하루에도 시시각각 변한다. 그러니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하고, 또 변한다. 그러므로 영원에 대한 집착은 허망한 것이다. 사랑도 영원할 수 없다. 우리는 사랑하는 순간 이별의 순간을 염려해야한다.

우린 그때 센 강의, 예술의 다리라는 뜻을 가진 퐁데자르 다리까지 걸어가서 시테 섬의 아름다운 풍경과 흐르는 강물을 번갈아 내려다보면서 감격에 겨워 얼마나 사랑을 맹세했던가. 그때는 우리 사랑이 영원할 줄 알았다.

또, 마로니에 나무와 미술관 순례가 가끔 생각나고……. 마로니에는 5월쯤 흰 바탕에 붉은 색을 띤 꽃이 만발하면 정말 환상적이었지. 몽빠르나스 대로의 마로니에가 녹색으로 우거지면 나폴레옹의 장군인 네이 사령관의 청동 동상— 승마 부츠를 신고 오른손에 칼을 들고 엉거주춤 자세를 취하고 서있는— 근처의 벤치에서 꽃잎의 짙은 향기에 취해서 오랫동안 앉아 있곤 했었지. 봄이 대기 속에서 한창 무르익어 감을 뼛속 깊이 느낄 수 있었거든. 그때 지빠귀들이 푸른 잎 속에 숨어서 얼마나 시끄럽게 지저대든지……. 주로 그녀와 함께 있었지. 아 아, 우린 서로가 그 시절 너무너무 행복했었는데…….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H가 갑자기 생각나는군. (나는 그녀의 이름을 밝힐 수가 없다. 어쩐지 밝혀서는 안 될 것 같다. 그게 지금 내 마음이다.)

H는 이제는 거의 잊어버렸기 때문에 망각에 묻힌 기억 속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있는 희미한 추상적 존재에 불과하였지만 내가 파리를 생각할 때면 불가피하게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균형 있는 몸매.—내가 여자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것은 건축가다운 안목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건축 설계에서 균형과 대칭, 간결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긴 검은 머리에 뿔테 안경을 써 지적으로 보이는 동유럽의 보헤미아에서 온 여학생.—그녀는 나 보다는 훨씬 나이가 어렸지만 학교 강의실에서 몇 번 만났고, 눈인사 정도를 나누는 사이가 되자 언제부터인가 데이트를 하게 된 것이다.

그 벤치에서 우리는 몇 시간씩이나 지치지 않고 건축 설계의 세밀한 과정과 완공된 건물에 대해 진지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남녀의 차이, 문화 배경의 차이 (중부 유럽의 바로크 양식의 세계와 동양적인 목조 기와집의 세계의 차이)를 떠나서 건축가는 건물을 사용할 사람들과 보다 긴밀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또한 건축에 쓸데없이 너무 많은 이데올로기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건축이란 원래 혼돈의 모험이긴 하지만 그러나 냉소주의만큼은 극복해야한다는 점에서, 건축은 사치품이 아닌 사회적 필수품이기 때문에 건축가는 형식과 스타일, 기교 대신 건축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므로 건물을 바로크식으로 장식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기능적이고 단순하고 삭막한 건축을 해야 한다는 아돌프 루스의 건축 미학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는 점 등에서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였다.

우리들은 자주 함께 즐거운 식사를 하고, 술을 진탕 마시고, 미술관과 박물관에도 갔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거대한 사기극이 연출되었던 테레지엔슈타트 출신이다. 유대계인지는, 전체적인 얼굴 윤곽과 검은 머리 (그녀는 숱이 많은 머리카락이 목덜미까지 흘러내려서 목을 완전히 감싸고 있는데 그러나 머리카락은 매우 여리고 마치 검은 그림자처럼 보인다.), 약간의 메부리코를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확실치 않다. 어쩌면 아슈케나지 유대인의 피가 반쯤만 섞였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1960년대 출생했으니까 1948년 이후 공산주의 체제, 1968년 이후 옛 소련이 탱크를 앞세워 체코를 점령하고 있던 그 공포의 시기에 암울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것들이 감수성이 극도로 예민한 시절에 그녀에게 간접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거나 상처를 입혔는지 그 고통의 깊이를 헤아릴 수는 없다.

그녀는 말했다. “그 나이에는 꿈같은 추억이 많을 때이지요. 그러나 난 초등학교 시절부터 홀로코스트의 비극에 대해서 귀가 따갑도록 들어야 했지요. 어머니는 그 참상을 겪은 뒤 딸에게 그 상처를 쏟아냈던 거예요. 자신의 아픔과 희생을 딸에게서 보상 받으려는 어머니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시절에 벌써 끊임없이 당국의 감시를 두려워했지요. 그래서 늘 불안했어요. 부모님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무엇인지 아세요? ‘항상 말조심해라. 이걸 밖에서 얘기해서는 안 된다. 그건 얘기하지 마라.’이었지요. 그 시절이 제 기억에서 지워졌으면 해요. 내가 꼭 이 세상에 태어나야 했다면 그 시절이 아니라 차라리 훨씬 나중에 태어났어야 했지요.”

그녀는 그 당시 여전히 이주자로서 느끼는 이중적인 낯섦과 동시에 프라하에 대한 향수병 때문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트라우마 때문에 나처럼 그런 증세를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 일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 여인 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자신의 우울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걸 자세히 캐물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내 자신의 상처를 들쑤시는 일이니까.

그녀는 내밀한 소외감과 지독한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 술을, 압생트를, 페르노를 많이도 마셨다.

생 미셀 거리의 터키 식당. 주인은 땟국이 지저분하게 얼룩진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터키의 전통 음식인 케밥을 열심히 굽고 있다. 케밥의 구수한 냄새가 실내를 가득 채운 가운데 맥주 냄새, 압생트의 향기가 희미하게 묻어 있다. 언제나 골초인 단골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가 지독하다. 그들의 땀에 젖은 축축한 몸과 잘 씻지 않은 성기에서 시금털털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들은 후줄근하고 지저분한 작업복 차림으로 죽치고 앉아 집에 들어가는 시간을 어떻게 해서든지 늦춰보려고 술잔을 홀짝거리며 미적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술에 취하면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릴케의 시를 읊었다. “……고독은 비처럼 바다에서 저녁을 향해 올라온다. 그러고 나서 언제나 외로운 하늘로 올라간다. 처음으로 그 하늘에서 도시 위로 떨어져 내린다…….”

밤이 깊었다.

가는 비가 내리는 거리는 텅 비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때 건축 공부에 미친 듯이 열중해서 여자를 길게 만나면 시간만 빼앗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 경계선을 설정하고 그 선 내에서 할 수 있는 행위를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나는 소리 없이 외쳤다. ‘더 이상 다가가서는 안 되는 거야. 그렇지…… 그게 한계인 거야!’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였고 실제는 나는 아직도 일종의 강박관념과도 같은 원죄 의식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 어떤 여자와도 진정한 관계를 가지지 못하였다.

얼마 후, 일 년쯤 후, 여자 쪽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지만 (내가 동의하였다면 우리들은 즉시 동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커다란 갈등이나 심적 동요 없이 자연스럽게 헤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자기기만이다.) 서로 별다른 신체적 접촉도 없었으니 마지막 헤어질 때 가벼운 포옹과 악수가 고작이었다. 다만 둘 다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으니 그대로 헤어진다는 것은 무언가 아쉬운 일이었다. (그녀는 헤어지면서 새삼스럽게 단정한 검은 머리, 반듯한 얼굴 그리고 꼿꼿한 자세로 앉아 강의에 열중하던 그의 태도를 되새겼다.)

파리의 늦은 밤.

밤공기는 차갑고도 축축했다.

그녀가 말했다. “서로 마음이 통했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 ……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헤어지다니요……. 이렇게 한심한 일이……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

“진짜 파리를 떠날 이유가 생겼군요. 파리는 연인들을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우리는 서로 두 눈을 크게 뜨고 응시하다가 가볍게 미소를 짓고 돌아섰다. 그저 그렇게 헤어진 것이다.

그때 퐁데자르 다리에서, 영원한 사랑을 기원하고, 우린 절대로 헤어져서는 안 된다고 서로 맹세하며 그걸 새긴 청동 자물쇠를 센 강의 강물 속에 던졌지만 그 자물쇠가 사랑의 이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이별이란 해피엔딩은 될 수 없다. 모든 이별에는 일종의 해방감과 함께 큰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센 강은 흐른다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되새겨야만 하는가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사랑은 가버린다 흐르는 이 물처럼 사랑은 가버린다 나날이 지나가고 주일이 지나가고 지나간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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