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전 대통령<좌>와 장경우 전의원<우>
나는 할아버지가 무서워요

운경 이재형 선행을 생각할 때 나는 곧 우리정치사의 비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의 삶 자체가 곧 우리 정치의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정치에 입문했던 시기는 선생이 10년간의 침묵을 깨고 다시 정계에 복귀했던 바로 그 시점이었는데, 선생은 어렵게 결단을 내렸던 이 복귀에서도 다시 한 번 크나큰 상처를 받은 채 돌아서야만 했다.

바로 그 과정을 지켜봐야 했던 나였기에 선생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은 각별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막 정치에 입문했던 나였기에 그 모든 과정은 더 큰 충격이었다. 이제 선생이 떠난 지도 이미 오래. 어줍잖은 나의 이 회고가 선생의 삶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될 뿐이다.

국회의원은 당이 뽑아 준 사람?

국회의원은 국민이 뽑아 준 국민의 대표다. 이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때문에 국회의원은 본인의 됨됨이로써가 아니라 국민의 대표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이고 도 그 권위는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아무리 못나도 일단 국회의원은 국회의원이다. 흔히 하는 말로 '국회의원이면 다야?'하는 비아냥이 있는데, 사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국회의원이면 다'라고 큰소리 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이 너무도 평범한 사실이 과연 우리 정치에서 지켜지고 있는가! 나는 이 부분에서 적잖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국회의원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그것은 꼭 외부적인 요인만은 아닐 것이다. 국회의원 스스로가 자신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재형 선생만큼 '국회의원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서른아홉이라는 젊은 나이로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내가 맨 처음 배운 것도 국회의원으로서 갖춰야 할 권위였다.

몰론 왕이 왕답기 위해서는 왕으로서의 품위와 자격을 갖춰야 하듯이 국회의원 스스로의 품위와 자격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정치인 스스로 국민의 대표로서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이재형 선생의 철칙이었다. 국회의원을 무섭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재형 선생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정당 내의 사정은 그렇지가 못했다. '국회의원은 당이 뽑아 준 사람'즉 '국민이 뽑아줘서 된 것이라기보다는 당이 지목하고 공천해 줬기 때문에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이른바 '당의 실세'들과 '당의 대표'였던 이재형 선생과의 기나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당 뺏지 안 달려면 들어오지도 마!

민정당 창당과 함께 최초의 국민심판이었던 11대 국회의원 선거는 민정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80년 '서울의 봄'을 구가하던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씨는 이미 정치규제에 묶여 가택연금과 은신을 하고 있을 때였고, 그 배경 속에서 이른바 신군부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그와 함께 당내에서는 바야흐로 권정달 사무총장과 이종찬 원내총무, 이상재 사무차장의 무소불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들 '당의 실세'들의 권한은 참으로 큰 것이어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을 무색하게 할 정도였다.

이렇듯 권력이 '실세'들에게로 집중되자 당에서는 여러 가지 웃지 못할 촌극들이 벌어졌다. 모든 당직자는 몰론이요, 국회원원들까지도 이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갖은 추태들을 연출했으니, 나는 여기에서 그것을 차마 다 드러낼 수가 없다. 

일례로 이들이 출근하자마자 방으로 찾아가 '아침 문안'을 드리는 것은 물론이요, 퇴근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서는 90도 허리를 굽혀 잘 가시라는 인사를 했다. 심지어 당시 중앙당의 국장을 역임했던 모 국회의원은 현관까지 달려 나가 바라보지도 않는 그들의 뒷꽁무니에다 대고 90도 인사를 하는 모습을, 나는 여러 번 봤다.

더욱 웃지 못할 촌극은 이상재 사무차장 방 앞에서 펼쳐졌다. 당시 이상재 사무차장은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사무차장이라는 '실세'로 항상 일반 국회의원들은 물론 국장급 국회의원들에게까지도 이렇게 호통을 치곤 했다.

 "당신들은 말야. 왜 국회의원 뺏지만 달고 당 뺏지는 안 다는거야? 당이 당신들을 국회의원에 당선시켰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거야?"

당 뺏지를 안 다는 것과 당의 권위를 살리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든 국회의원 뺏지가 꼴사납다는 얘기일텐데…아무튼 그 많은 국회의원들이 그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꼼짝 않고 당하고만 있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것도 부족해 이제는 사무차장의 방 앞에만 가면 국회의원 뺏지를 빼내고 당 뺏지를 달기에 바빴으니, 만약 그를 뽑아 준 국민들이 그 모습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참으로 아득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와중에 한 번은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당시 부대변인이었던 이종률 씨가 매일 아침 열리는 사무차장 주재의 국실장 회의에 참석했을 때 이상재씨의 큰 소리가 터져나왔다.

 "당신 말요, 앞으로 당 뺏지 안 달려면 이 방에 들어오지 마쇼!"

마침내 이종률 씨의 인내가 한계에 달했다. 그 역시 만만찮게 나왔다.

"당 뺏지가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안 그렇습니까? 당원으로서 주인의식을 갖고 당에 대한 애정만 있으면 되지 그깟 당 뺏지를 달고 안 달고로 당에 대한 충성심을 가늠한다면 그건 옳지 못하다고 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다. 하며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사실 이 모두가 당시의 정치 상황을 한마디로 말해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곧 우리 정치의 불행이자 비극이기도 하다.

고래싸움에 새우 등만 터지누나!

국회의원도 아닌 사무차장이 국회의원을 향해 그렇게 호통을 칠 정도였으니 이들 실세들의 권한이 얼마쯤이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밤낮으로 그들 실세들의 방은 들끓었고 당 대표의 방은 썰렁했다. 이재형 선생은 상징적인 존재, 이른바 '얼굴 마담'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재형 대표는 결코 그런 상황을 좌시하진 않았다. 국회의원의 권위가 무시되고 있다고 판단되면 될수록 더 원칙을 중요시했다. 그 과정에서 이재형 선생이 언제나 강조하는 것은 '당헌 당규대로'였다. 당헌과 당규대로만 한다면 모든 것은 다 해결된다는 것이다.

당헌 당규대로 해라! 이 원칙에 관한 한 어떻게나 철저하셨는지, 아주 사소한 것만 몰라도 혼쭐이 나기 일쑤였다. 특히 보좌역으로 있던 나는 아예 달달달! 당헌 당규를 외어버리지 않는 한 그 앞에서 온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문제로 언제나 제일 많이 지적을 당하고 비판을 당한 사람은 다름 아닌 권정달 씨였다.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 알다시피 군인의 속성은 속전속결이다. 하나하나 절차를 따져가며 원칙대로 하는 것은 '말만 앞세우는 일'로 여겨졌을 것이고, 원칙에 따라 제대로 절차를 밟아 하라는 이재형 대표의 철칙은 항상 충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령, 아침에 사무총장의 방에서 '이런 성명을 내자'는 결정이 났다고 하자. 원칙대로 하자면 당연히 이것을 당 대표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아야 한다. 그럼 결재를 받으러 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재형 대표는 '회의도 거치지 않고 어찌 그런 성명이 나왔소?'라고 반문한다… .하나에서 열까지 이런 식이었으니, 사무총장과 당 대표 사이에 마찰음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든 이 과정에서 정작 곤욕을 치르는 건 나였다. 권정달 씨가 회의석상에서 '당헌 당규대로'대표에게 무안을 당하고 난 후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맨 먼저 부딪히는 얼굴이 나였다. 그러면 한 마디가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저 영감은 무슨 절차를 그렇게 따지나! 정말 죽겠구만!"

이렇게 혼잣소리만 하는 데까지는 좋았는데…한 번은 끝내 나와 충돌을 하고 말았다. 

중앙 집행위원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아마 그 날도 권정달 씨는 당 대표로부터 질책성 비판을 받은 모양이었다. 회의석상은 9층이었는데 회의가 끝날 즈음 계단을 오르고 있던 나는 권정달 씨와 맞닥뜨렸다. 그리곤 갑자기 튀어 나오는 고함소리.

"야, 임마! 넌 도대체 영감님을 어떻게 모시는 거야?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너무도 급작스럽게 당한 일이었다. 그 때 주변에는 당시 대변인이었던 박경석 의원, 서울신문의 이동화 기자, 그리고 중앙일보의 고흥길 기자 등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모욕감이 치밀어왔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야, 임마라니요! 저도 애가 중학생입니다. 지금 누구에게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하시는 겁니까!"

내 목소리도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나를 끌고 계단을 내려왔다. 곧 강창희 의원이 달려왔다. 강창희 의원은 권정달 사무차장의 보좌역이었는데, 당 대표와 사무총장과의 갈등 사이에서 서로 동병상련의 아픔을 함께 나누던 사이였고, 사석에서는 형 아우하며 지내던 사이였다.

"형이 참으쇼! 아마 형이 나와 친하고 하니까 내 동기인 줄 알았나 봐요. 아무튼 참아요."

강창희 의원은 권정달 씨의 육사 후배였다. 물론 내가 강창희 의원과 친하고 하니까 동기로 알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아무리 어리고 못났다 해도 엄연히 당 대표를 모시고 있는 공식 보좌역이다. 사무총장 아니라 설령 대통령이라 해도 한 사람의 공인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나는 끝내 강창희 의원을 뿌리치고 사무총장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조금 전 한 행동이 자신이 생각해도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권정달 씨는 웃음부터 터뜨렸다.

"아, 장의원이 나이가 어떻게 되지? 난 강창희하고 동기인 줄 알았어?…."

 "아무리 동기인 줄 아셨다 해도 다중이 있는 앞에서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만약 제가 대표를 잘못 모시는 일이 있으면 사석에 불러 말씀을 하시는 게 순서지 갑자기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제 입장은 뭐가 되고 또 제 심경이 어떻겠습니까!"

"아…몰라서 그랬다니까…미안해 미안해!"

결국 그 날의 해프닝은 그렇게 일단락이 되었다. 내가 겪은 그 해프닝이야말로 당시 당의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일이었고, 그 속에서 막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내가 받아야만 했던 충격은 실로 큰 것이었다. 그러나 이건 이재형 선생이 받아야만 했던 상처에 비하면 아무런 것도 아니다.

나는 할아버지가 무서워요

당대표와 사무총장 사이에서 내가 치르어야 할 곤욕과 곤혹스러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빈도수를 더해 갔고 강도를 더해 갔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주례회의 때마다 제일 난처한 건 나였다. 당시 회의 참석자들은 미리 사무총장이나 사무차장의 방에서 자신들끼리 회의를 마친 연 후에 주례회동에 오곤 했는데 때문에 언제나 늦게 오곤 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미 다 결정 날 일을 형식적인 보고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으니 그 자리가 내킬 리가 없었다.

이재형 대표는 이미 회의 준비를 다 마치고 기다리고 있는데 정작 사무총장이 나타나질 않으니 '왜 안 오냐!' 재촉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면 나는 또 사무총장의 방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 가보면 정작 그들은 또 방담을 나누고 있다. 그렇다고 또 그대로 보고 드릴 수도 없는 일.

 "조금 급한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곧 도착하시겠답니다."

참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또 막상 회의에 나타난 권정달 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깍듯한 태도로 '죄송합니다'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군인특유의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면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것이다. 이래 저래 중간에서 나만 죽어나는 것이다.

사실 곤혹스럽기는 주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주례회동 때였다. 그 날도 권정달 씨는 늦어지고 있었다. 권정달 씨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 보니 항상 회의는 조금씩 늦어지기 마련인데 어떻든 그 날도 조금 늦게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이재형 대표가 당시 대변인이던 봉두완 씨를 향해 물었다.

"봉의원은 누구 대변인이요?"

"그거야…당과 대표의 의견을 전달하는…"

"당 대표의 의견을 전달한다?… 그런데 말야. 나는 그런 얘기 한 적이 없는데, 왜 엉뚱한 얘기가 나가는 거죠? 왜 나에게 사전에 얘기도 없이 마음대로 성명을 발표하고 그러느냐는 거요."
  "… "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요!"

이재형 대표의 말은 단호했다. 그런데 대표의 말이 끝나자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봉두완 씨의 말.

 "나는 할아버지가 무서워요!"

순간 좌중은 까르르…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세상에 얼마나 답답했으면 엉겁결에 그런 말을 터뜨렸을까. 봉두완 씨가 워낙에 유머가 많은 사람이다보니 그나마 그렇게 넘길 수 있었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벙어리 냉가슴 앓는'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원칙을 따르자니 실세로 장악된 당의 현실이 울고, 그 현실을 따르자니 원칙이 울었던 것이니…어쨌거나 당시 당의 상항은 이래저래 여러 사람들에게 못할 짓 많이 시킨 셈이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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