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혜 기자]한국 영화계에 가장 밝게 빛난 '별'이 졌다. '국민배우' 신성일이 4일 오전 2시 30분 폐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81세.

신성일 측 관계자는 이날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 이사장이신 영화배우 신성일께서 4일 오전 2시 반 별세했다"고 밝혔다.

고(故)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왔으나 이날 끝내 숨을 거뒀다.

 고인은 1960∼197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린 배우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고인은 1937년 경북 대구 태생으로 본명은 강신영이다. 도청 공무원으로 일하던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경북중을 거쳐 경북고에 입학했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면서 고교 졸업후 상경해 호떡장사 등으로 학비를 벌며 서울대 입학을 노렸지만 실패한 후 배우의 꿈을 꾸게 된다.

어렵게 연기학원을 다니며 배우 데뷔를 노리던 중 1957년 당시 최고의 영화제작사였던 신필림의 신인연기자 공모에서 2640 대 1의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선발됐다. 이후 신필름의 ‘뉴스타 넘버원’이라는 뜻을 담고 신성일(申星一)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본명과 예명을 합친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1960년 신상옥 감독·김승호 주연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후 '맨발의 청춘'(1964년), '별들의 고향'(1974년), '겨울 여자'(1977년) 등 숱한 히트작을 남기며 독보적인 스타 자리에 올랐다.

고인은 한동안 대한민국 대표 미남배우로 군림하며 ‘세기의 미남’으로 불린 프랑스 배우 알랭 드롱과 비교돼 ‘한국의 알랭 드롱’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출연작품 편수도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데뷔 이후 500편이 넘는 다작을 남겼다.

1963년 한 해에만 '청춘교실' 등 21편에 출연했으며, 1964년에는 '맨발의 청춘' 등 32편, 1965년 '흑맥' 등 34편, 1966년 '초우' 등 46편 영화에 출연했다.

'안개' 등 51편 영화에 출연한 1967년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해였으니, 이해 제작된 한국 영화는 총 185편이었다.

고인은 전성기였던 1964년 당대의 톱스타 엄앵란과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결혼했다. 데뷔작 ‘로맨스 빠빠’를 비롯해 ‘아낌없이 주련다’ ‘청춘교실’ ‘새엄마’ 등 9~10편의 영화에서 상대역은 아니었지만 호흡을 맞췄던 한 살 연상의 엄앵란과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 작품은 ‘배신’이었다. 키스신 촬영에서 엄앵란에게 실제로 입을 맞춰 자신의 마음을 처음 알렸던 그는 이후 촬영 도중 벌어진 화약 폭발 사고로 얼굴을 다친 엄앵란을 극진히 간호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하객과 모여든 일반 시민의 수가 3400여명에 달했고, 초청장이 엄청난 가격에 암거래되는가 하면 결혼식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호텔 측에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 결혼식은 당시 외신에도 보도됐으며 지금까지도 ‘세기의 결혼식’으로 회자되고 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기록적 다작 속에서 생명력 있는 행군을 펼친 것은 한국 영화사에서 그 예를 찾기 불가하다"며 "기록적 출연 편수야말로 그 스타성 증거"라고 평했다.

명성만큼이나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1968년과 1990년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대종상영화제 공로상, 부일영화상 공로상 등 수없이 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영화 관련 단체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1994년에는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 부이사장을 지냈다. 2002년에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과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았다.

아울러 대구과학대학 방송연예과 겸임교수, 계명대 연극예술과 특임교수를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등의 저서를 남겼다.

고인은 영화계 성공을 발판으로 정계에도 진출했다.

1978년 제10대 서울특별시 용산·마포 중선거구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박경원 전 내무부 장관의 특별보좌역으로 발탁돼 정계에 입문했다. 이어 2000년 대한민국 16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해 당선돼 4년간 활동했다. 2001년에는 한나라당 총재특보를 지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 마포·용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으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그러나 삼수 끝에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의정활동을 펼쳤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자유한국당 강석호 의원이 그의 조카다.

고인은 옥고도 치렀다. 국회의원이던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옥외 광고물 업체 수의계약과 관련해 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2005년에 징역 5년에 추징금 1억 8700만원을 선고받아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됐다. 2007년 특별사면됐다.

▲ 배우 신성일이 2011년 12월 5일 오전 서울 남대문로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 출간기념회에서 경부고속도로에서 박정희 전대통령의 차량을 추월했던 과거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고인은 2011년 본인의 불륜 관계를 담은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를 출간해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불륜을 저지른 유명인의 실명을 공개해 비난에 휩싸였다. 고인은 이후 불륜 폭로 발언이 자서전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욕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며 부인 엄앵란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고인은 최근까지도 투병중인 몸을 이끌고 대중앞에 모습을 보였다. 올해 3월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 출연해 자신을 걱정하는 가족들을 다독이며 가족에 대한 사랑과 미안함을 드러냈다. 이어 올해 10월에는 건강 악화 속에서도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는 등 끝까지 영화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고인은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 20대 국회 강석호 자유한국당 의원은 고인의 조카다.

전찬일 평론가는 "신성일은 투병 와중에도 그가 아니면 소화해내기 힘들 파격적 의상과 환한 미소로 부산영화제 개막식을 빛냈다"며 "부산영화제 개막식 주인공을 단 한 명 꼽으라면 단연 신성일이었다"고 평했다.

유족으로 당대 최고의 여배우 부인 엄앵란 씨와 장남 석현·장녀 경아·차녀 수화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4호실에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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