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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거인들2】]"죽기를 각오했다"…남자현, 항일무장투쟁 선봉서다
김승혜 기자  |  sh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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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21  06: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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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현(1872~1933). (제공 = 국가보훈처)
[김승혜 기자]"1933년 2월27일 오후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최대 도시 하얼빈의 도외정양가 거리. 으슬으슬한 날씨에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이 오가는 가운데 모자를 눌러쓴 한 여인이 걷고 있었다. 다 해진 옷을 걸쳐 행색은 남루했지만 눈은 결기로 빛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경찰이 요란하게 호각을 불어댔다. 몇 차례 총성이 울린 뒤 경찰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 쓰러진 여인은 당황한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의병 활동을 벌이다 전투 중 사망한 남편의 피 묻은 군복을 입은 채였다."

다가올 모진 고문을 훤히 알면서도 초연하게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이는 조선의 독립운동가 남자현(1872~1933)이었다. 

망부(亡夫)의 설원(雪寃) 위해 독립군의 어머니로

남자현은 1872년 12월 7일 경북 안동군 일직면 일직동에서 영남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南珽漢)의 3남매중 막내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품성이 단정하고 총명하였으며 7세 때에 국문에 능통하였고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통달하였다.

19세에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 사는 의성 김씨(義成 金氏) 김영주(金永周)에게 시집 가 단란한 생활을 꾸렸으나 일제의 만행이 점차 극성을 부리자 남편 김씨는 1896년 선생에게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을 것인가. 지하에서 다시 보자며 결사보국(決死報國)을 결심하고 영양의병장(英陽義兵將) 김도현(金道鉉) 의진에서 왜군과 전투중 전사하였다 한다.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선생은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3대 독자 유복자인 아들과 시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수 없어 양잠(養蠶)을 하며 손수 명주를 짜 내다 팔아 가계를 이어 나갔다.

선생의 나이 46세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항일 구국하는 길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임을 깨닫고 3월 9일에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통화현(通化縣)으로 이주해 서로군정서에 가입, 군사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북만주 일대에 농촌을 누비며 12개의 교회를 건립하였으며 여성계몽에도 힘써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권신장과 자질향상에 주력하였다.

만주에 파견된 일본전권대사 무토노부요시(武藤信義)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 지 한 달여 만에 거사를 치르려다 붙잡힌 것이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10대 후반의 소녀들이 혼례를 올렸던 시대상을 감안하면 증조할머니뻘인 나이였다.

그해 3월1일은 만주국 수립 첫돌이었다. 성대한 기념식에 참석 예정인 무토노부요시를 죽여 독립운동의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하는 게 남자현의 목표였다. 정해진 장소에 붉은 천이 휘날리면 무기가 든 상자를 건네받아 홀로 무토노부요시를 처단하려 했다. 하지만 누군가 배신을 했는지 무기를 받으러 가던 길에 일본 경찰이 급습해버렸다.

수감된 남자현은 곡기를 끊어버린다. 60대 노파가 고문과 단식으로 사경을 헤매자 일본 경찰은 부랴부랴 그를 석방했다. 

오랫동안 추운 만주 지방에서 거친 독립운동을 해온 그의 몸은 끝내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의 사망을 전한 조선중앙일보의 당시 보도에 따르면 그는 "이미 죽기를 각오한 바다"라고 말했다. 

그는 죽기 전 식사를 권하는 가족에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에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아들과 손자에겐 중국돈 약 250원을 건네며 "이 중 200원은 조선이 독립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치고 남은 돈은 손자들을 교육하는 데 쓰라"고 당부했다. "독립은 정신이다"란 말도 남겼다.

무토노부요시 암살 계획은 그의 첫 의거가 아니었다. 기록마다 시기엔 다소 차이가 있지만 1926년께 그는 일본 총독 사이토마코토(齋藤實)를 죽이려고 했다. 사이토마코토는 사상교육과 선전을 통해 조선인을 일본 문화에 동화시키자는 문화통치를 내세운 인물이다. 문화통치는 3·1운동을 보고 화들짝 놀란 일본이 내세운 정책으로, 친일파를 육성하는 데 주력했다. 

조선사회를 분열시키는 사이토마코토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남자현은 아들 김성삼에게 "나라가 없으면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 이 나라의 혼을 말살하는 이의 목숨을 끊어 조선을 부흥시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이라고 말했다. 

   
▲ 】<무등대장 모살범, 남자현(여) 遂 별세, 단식으로 극도로 쇠약한 결과, 22일 하얼빈에서> 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27일 기사. (제공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같은 결심은 역설적이게도 또 다른 조선인의 암살 시도로 무산됐다.

일본인의 농기구 가게에서 일하던 송학선(1897~1927)이 1926년 4월28일 경성부회 평의원(京城府會評議員)들이 탄 차를 사이토마코토의 차로 오인하고 그 안으로 뛰어올라 평의원들을 살해했다. 이 때문에 사이토마코토의 경호가 강화, 남자현도 경찰의 감시 대상에 올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었다.

송학선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남자현은 세 차례 손가락을 자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20년대 만주에서 여러 갈래 독립단체들이 분열하자 그는 손가락을 잘라 통합을 호소했다. 1920년 8월29일 국치기념대회에서 왼손 엄지를 베어 그 피로 혈서를 써 읽었고 1922년 3월 독립군끼리 충돌하자 검지를 잘랐다. 

또 60세를 맞은 1932년 9월19일, 하얼빈을 방문한 국제연맹조사단장 리튼에게 전달하기 위해 왼쪽 약지 두 마디를 잘라 '대한독립원' 이란 다섯 글자를 썼다.

당시 일본이 만주를 중국 침략의 군사 기지로 만들려고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자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셌다. 국제연맹은 이같은 비난 여론을 고려해 조사단을 현장에 파견했다. 

남자현은 이 국제연맹조사단장에게 혈서를 전하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혈서를 썼다. 한 인력거꾼에게 돈을 주며 명주치마에 싼 혈서를 리튼 단장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일본 경찰의 검문에 걸려 실패했다.

남자현은 1933년 8월 마침내 죽기로 결심하고 옥중에서 15일 동안의 단식투쟁을 벌였으나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로 사경에 이르게 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경은 보석으로 석방하였는데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다시 하얼빈에 있는 조모 씨(趙某氏) 여관으로 옮겼으나 임종이 다가오고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

남자현은 유복자인 독자 영달(英達)에게 중국화폐 248원을 내놓은 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독립축하금으로 이 돈을 희사하라고 하였다(이 유언에 따라 유족들은 1946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전에서 김구·이승만 선생에게 이를 전달하였다고 함).

당시 하얼빈의 사회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선생을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존경하고 하얼빈 남강외인(南崗外人)묘지에 안장하여 입비식(立碑式)을 갖고 생전의 공로를 되새겼다. 여성으로서 평생을 바쳐 독립운동의 정화(精華)가 되어 찬란한 빛을 남긴 선생의 영전에 동지들은 깊은 애도를 표하였다.

남자현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1933년 8월 22일 향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이상국 <남자현 평전>(2018), 강윤정 <여성독립운동가 南慈賢의 항일투쟁>(2018),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 제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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